별은 저물면서 빛을 남겼다···"이건희 유산, 韓미술 분기점 이뤄"

서지혜 기자 2023. 10. 25.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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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컬렉션 해외전시 준비···류지연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 인터뷰
[서울경제]

“박수근·이중섭 등은 국내 미술계에서는 거장이지만 해외에서는 인지도가 높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작품이 이건희 컬렉션 전시를 통해 세계 대형 미술관에 걸리면 해외 미술계에서 한국 작가들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질 것입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27년째 전시 실무를 담당해온 류지연 학예연구관(학예실장 직무대리)은 “2025년 미국 스미소니언미술관을 시작으로 2026년 영국 대영박물관, 미국 시카고미술관 등에서 이건희 컬렉션 해외 순회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그는 “근대 작가들의 걸작이 해외 미술관에 소개되면 그만큼 현대미술에 대한 평가도 높아지고 시장도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2021년, 대중에 공개된 명작들 미술품 기증문화 확산시킨 계기 백남순 등 미술사 연구에도 큰 획
18일 서울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열린 이건희 선대회장 3주기 추모 삼성 신경영 3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장 입구에 이 선대회장의 사진과 어록이 전시돼 있다. 연합뉴스
류지연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 (학예실장 직무대리)

국내에서 2년여간 약 200만 명의 관람객이 감상한 ‘이건희 컬렉션’이 세계로 진출한다. 국립현대미술관과 국립중앙박물관 등은 현재 해외의 다양한 미술 기관과 이건희 컬렉션 전시 기획을 논의하고 있다. 류 학예연구관은 “근대 작품 전시 경험이 많은 일본을 비롯해 해외의 많은 미술관에서 협력 문의가 들어오고 있다”며 “올해가 지나면 이건희 컬렉션 전시의 휴지기를 갖고 해외 전시 등을 준비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미술계에서 2021년 4월은 중요한 분기점이다.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의 유족이 고인의 방대한 미술품 컬렉션 2만 3000여 점을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지역 미술관 등에 기증하면서 국보급 문화재와 교과서에서만 볼 수 있는 근대 작가의 걸작이 개인의 사유재산에서 공공재가 됐다. 공공 전시 기관의 소장품이 늘어나면 문화생활을 향유할 수 있는 구성원이 보다 다양해진다. 2022년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이 ‘어느 수집가의 초대’라는 주제로 연 이건희 컬렉션 전시는 미술관을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사람들도 ‘오픈런’에 동참할 정도로 대성황을 이뤘다.

이후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은 엄선한 작품 150점을 50점씩 3개 세트로 나눠 동시에 3곳의 지방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전시하는 ‘전국 순회 전시’를 진행했다. 지방 곳곳의 미술관에서 ‘10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다녀갔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전국에서 200만 명의 사람들이 이건희 컬렉션을 감상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계로 뻗어나갈 韓미술 위상 2025년 美 시작으로 글로벌 순회 "이중섭 등 거장 인지도 올라갈것"

이건희 컬렉션 기증은 또 다른 대규모 기증으로 이어졌다. 작가가 작품 일부를 기증하는 방식을 넘어 대량 기증이 이뤄지는 일이 잦아졌다. 올해는 동산방 화랑의 설립자 고(故) 박주환 씨가 수집한 한국화 등 209점의 작품을 아들 박우홍 동산방 대표가 기증했다. 이 덕분에 이건희 컬렉션 1488점의 기증이 이뤄진 2021년 이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구성에서 기증품 비중이 구매품을 넘어섰다. 최근 수년간 상속세 추징이 강화되고 올해부터 물납제(미술품으로 납세)가 시행된 탓도 있지만 미술품 기증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바뀐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류 학예연구관은 “기증에 대한 인식이 좀 더 보편화되면서 작가나 화랑 대표, 혹은 유가족들이 작품을 대량 기증하겠다는 문의가 계속 되고 있다”고 말했다.

미술관 입장에서는 폭넓은 한국 근대미술사 연구가 가능해진 것도 순기능이다. 2021년 이전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 중 근대미술 작품은 20% 미만으로 저조했지만 기증 이후 큰 폭으로 확대됐다. 류 학예연구관은 “그간 실물을 볼 수 없었던 이중섭·권진규 등 근대 작가들의 초창기 작품이 들어왔다"며 “한 작가의 일대기를 그리는 기획과 깊이 있는 연구가 가능해졌다”고 설명했다. 나혜석과 함께 한국 근대 여성 화가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백남순이 대표 사례다. 백남순의 작품은 대부분 사라진 데다 작가가 말년을 거의 미국에서 보내 관련 연구가 힘들었지만 이건희 컬렉션 기증으로 작가의 유일한 1930년대 작품인 ‘낙원’을 소장하게 돼 연구의 퍼즐이 맞춰졌다.

백남순 화백의 ‘낙원’. 사진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규모의 확대는 외부 기관과의 많은 협업 기회도 제공한다. 지방 미술관에서 이건희 컬렉션 순회 전시를 열 수도 있고 국내 작가들의 작품을 해외 굴지의 미술관에 소개할 수도 있다. 류 학예연구관은 “캐나다 국립미술관 등 세계의 대형 미술관이 최근 한국계 큐레이터 직을 신설하고 있을 정도로 한국 미술에 대한 관심이 굉장히 크다"며 “이건희 컬렉션의 해외 순회로 세계 미술계에서 한국 미술의 위상은 지금보다 더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관람객들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건희 컬렉션의 일부인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를 감상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경기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모네와 피카소, 파리의 아름다운 순간들’ 전시에서 관람객이 작품들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이중섭이 1950년대 전반에 그린 ‘닭과 병아리’. 국립현대미술관의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이중섭’을 통해 최초로 공개됐다. 사진 제공=국립현대미술관
1986년 호암갤러리 전시 이후 36년 만에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이중섭’을 통해 일반에 공개된 이중섭의 ‘춤추는 가족’.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지난해 경기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모네와 피카소, 파리의 아름다운 순간들’ 전시에서 관람객이 작품들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국립대구박물관에 걸린 겸재 정선이 ‘인왕제색도’. 연합뉴스
서지혜 기자 wis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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