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무엇이 문제인지 잘 모르는 것이 문제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고속도로 진입로에서 색깔로 차량의 길을 안내해 주는 안내선을 처음 제안한 분의 인터뷰를 보고 감탄한 적이 있다. 고속도로의 복잡한 입체교차로에서 올바른 진입과 진출구가 어딘지 정확히 몰라 어려움을 겪었던 기억은 많은 운전자에게 좋지 못한 경험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2011년 영동고속도로 안산분기점에서 인명사고를 동반한 4중 추돌사고가 발생했고, 한국도로공사에서는 유사 사고 예방을 위한 대책으로 '초등학생도 알 수 있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라는 지침을 내렸다고 한다. 신속한 판단을 내려야 하는 고속도로 진입·진출구에서 누구나 즉각적으로 가야 할 방향에 대한 시각적 인식이 가능하지 않은 상황이 문제라는 것을 간파했기에 나온 지침일 것이다.
당시 제안자는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는 자녀의 모습을 보고 “이거다!” 하면서 노면에 색깔로 차량 진행을 유도하는 선을 그리는 아이디어를 냈다고 한다. 지금은 자연스럽게 내비게이션이 안내해주고 있는 분홍색, 녹색 안내선을 따라 주행하라는 아이디어가 왜 진작 나오지 않았나 싶지만 당시 도로 위에 표시할 수 있는 색은 하얀색, 노란색, 적색, 청색 정도로 제한돼 있었고, 틀을 깨는 아이디어가 나오기 어려운 환경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새로운 색깔의 유도선 덕분에 유사 교통사고의 빈도가 현격히 줄었다고 하니 이 문제 해결로 사람들의 삶이 더 나아지는 큰 효과가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훌륭한 예처럼, 주어진 문제를 효과적으로 풀어내는 방식은 무엇일까.
“무엇이 문제인지 잘 모르는 것이 문제다.” 언젠가부터 필자가 책을 쓴다면 이 문장을 제목으로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인생에서 혹은 회사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문제를 풀어야 할 때마다 문제의 핵심을 간파하는 것이 우선이어야 한다는 경험치가 쌓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해결할 '문제'(Problem)라고 일컫는 것은 '문제점'이 아닌, '우리가 풀어야 할', '1번 문제'와 같이 출제된 '풀기 위한 문제(Question)'를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를 기반으로 '문제 해결 프로세스'라는 말이 생겼고, 창조적 문제해결 방법인 '디자인 씽킹(Design Thinking)' 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문제해결 프로세스
문제 해결 프로세스는 1) 문제 인식 2) 문제 분석 3) 대안 창출 4) 대안 평가 5) 대안(해결안) 제시와 같이 5단계를 거친다.
1)문제 인식
문제 인식 단계에서는 다시 문제 재정의와 목표 설정이라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 단계에서는 문제가 생성된 배경을 파악하고, 배경 속 요인들을 다각적으로 분석해 드러난 문제 이면에 숨겨진 근본적 문제를 찾아 문제 해결을 통해 이루고 싶은 바를 정의하는 것이다. 문제 해결로 이루고 싶은 바란, 고객에게 어떤 말과 행동을 이끌어 내겠다는 외부적인 목표뿐만 아니라 상사에게서 어떤 반응을 얻어 내겠다는 것과 같은 내부적인 목표도 해당한다.
특히 문제를 재정의한다는 것은 문제의 구조를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어떤 문제는 한 번에 풀 수 있다. 반면 어떤 문제는 보다 작은 문제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기도 하고, 또 어떤 문제는 인과 관계로 엮여 있기도 하다. 구조가 복잡한 문제는 수학에서 인수분해를 풀 수 있는 작은 단위 문제의 조합으로 나누어 문제의 차원을 낮춰야 한다. 흔히 너무 복잡해 한 번에 풀리지 않는 문제를 '고차원적'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비교적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저차원적' 문제들의 조합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의미이며 이것을 '문제 구조화 과정'이라고 일컫는다.
새로운 헤어드라이어를 개발하라는 문제가 주어졌다고 가정하자. 이 문제를 손잡이와 흡기구와 배기노즐과 히터가 달린 기기를 개발하라는 문제가 아닌, 목욕 후 머리를 가장 편리하게 말릴 수 있는 제품을 개발하라는 문제로 바꿔야 한다. 다시 이것을 쪼개 두 손을 자유롭게 사용하면서, 바람의 열기를 쉽게 조정할 수 있고, 몸도 춥지 않게 말려줄 수 있는 기기를 개발하라고 재정의한다면 아마도 더 나은 해결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의 심리 경향을 어떻게 분류할 수 있을까. 유사하지만 더 크고 복잡한 문제를 다뤘던 예도 있다. 캐서린 브릭스(Katherine C. Briggs)와 이자벨마이어스(Isabel Briggs Meyers) 모녀는 50여년간의 연구를 통해 인간 심리를 △심리방향성(내향·외향) △인식형태(직관·감각) △판단기준(감정·사고) △생활양식(즉흥인식·계획판단)이란 4개의 기둥(Pillar)으로 분해해 16개의 성격지표를 만들었다. 이것이 오늘날 심리 검사에서 활용되고 있는 MBTI이며, 오늘날까지 인간의 심리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구조화해 인간의 성향이라는 복잡한 문제를 보다 쉽게 인식하기 위해 활용되고 있다.
2)문제 분석
문제가 발생한 모습과 그 배경을 분석하는 일은 바람직한 문제 해결을 위한 필수적 과정이다. 이 과정을 통해 지금 내가 처한 상황 혹은 현재의 모습과 내가 목표로 하는 성공의 모습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이해할 수 있다. 그 간극을 정량적 혹은 정성적으로 파악하면 이를 좁히기 위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
문제 인식이 문제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분해하는 발산(Divergent)의 과정이라면, 해결 방향성을 찾는 일은 수렴(Convergent)의 과정으로, 최대한 함축적이고 명료한 방향을 수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3)대안 창출
문제 해결을 위한 여러 가지 방향성이 제시되면, 일단 각각의 방향성 별로 다량의 해결 아이디어를 도출해야 한다. 이 과정 또한 발산(Divergent) 과정으로, 하나하나의 아이디어는 크게 가치 없어 보이지만 방향성 별로 몇 가지 아이디어들이 묶이면 가치 있는 '콘셉트'로 진화한다.
문제가 재정의되고, 구조화되고, 단순해져, 명백히 해결방안이 보이는 듯해도 남들과 확실히 차별화되는 답을 얻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보편적 기대 수준을 넘어서는 창의적 해결안을 찾기 위한 다양한 '창의적' 발상 방법론들에 대한 고민은 오랫동안 연구됐다.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것들을 조합하여 새로운 것을 도출해 내는 시네틱스(Synectics), 선입견과 사전 평가에서 벗어나 확실히 불가능하다고 증명되지 않은 한 어떤 것도 불가능하다고 할 수 없다는 가능성의 추구 관점에서 창안된 형태분석법(Morphological Chart), 의도적으로 시험할 수 있는 7가지 규칙(대체-결합-적용-변형-변경-제거-재배치)을 활용한 창의력 증진법인 스캠퍼 기법(SCAMPER) 등 매우 다양한 방법들이 실제 기업에서 활용되고 있다.
창의적 아이디어를 내고 실현하기 위해서는 제약 없이 무엇이든 제안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문제 해결이라는 목표를 위해 현실적인 제약에서 벗어나 미래를 향해 도약해 보는 담대함과 용기를 발휘하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4)대안 평가
대안을 제시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기 아이디어가 가장 그럴듯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대안은 철저하게 그것이 필요한 사람 입장에서 평가돼야 한다. 이를 위해 콘셉트 검증(PoC)이라는 방법이 활용된다. 아직 실제 해결안은 아니지만 유사한 프로토타이핑을 통해 필요한 사람이 효용을 경험해 보게 해서 가치를 느끼는지 확인해 보는 과정이다.
5)대안(해결안) 제시
최종 해결안 제시 단계에서는 단지 최종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것을 실행에 옮기는 과정에서 필요한 사항 혹은 제약 조건에 맞는 단계별 계획을 수립하는 일이 반드시 동반돼야 한다.
◇LG전자의 문제해결 프로세스 사례
2016년 LG전자에서 출시한 'LG 퓨리케어 360° 공기청정기'도 이와 같은 문제 해결 프로세스를 거쳐 탄생했다. 고객이 선호하는 새로운 공기청정기 콘셉트를 제안하라는 문제가 주어졌을 때, 맨 먼저 한 일은 공기에 대한 고객의 문화적 인식, 공기청정기를 구매하고 사용하는 모든 과정에서의 걸림돌에 대한 연구조사였다.
그 과정에서 하루 종일 공기청정기를 틀어놓는 한국 고객에게 공기청정기의 성능과 청정 범위, 그리고 디자인 대한 신뢰가 부족하며, 이것들을 채워준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다는 기대를 할 수 있었다. 이를 위해 다양한 경험 프로토타입을 제작하여 고객 평가 및 지불 가치를 검증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 과정에서 균일한 공기 토출을 보여주며 실내 인테리어를 저해하지 않는 디자인, 내장 서큘레이터를 움직여 청정 공기를 멀리 보내는 기능을 반영한 콘셉트를 기획하고, 다양한 고객 검증과정을 거쳐 출시했다. 이후 LG 퓨리케어 360° 공기청정기는 2세대까지 출시되게 됐고, 에어로 타워와 같은 파생 상품까지 나왔다. 이를 바탕으로 LG전자는 국내 공기청정기 시장에서 1위의 입지를 공고히 하게 됐다.
또 하나의 사례로 'LG 디오스 오브제컬렉션 무드업'을 들 수 있다. LG전자는 공간가전을 지향하는 오브제 컬렉션의 성공을 잇는 개인화와 맞춤을 지원하는 가전상품을 기획해야 하는 문제를 갖고 있었다. LSR(Life Soft Research)고객연구소 연구결과에 따르면, 고객은 SNS의 알고리즘을 통해 콘텐츠와 서비스가 자신에게 최적화되는 개인화, 맞춤화에 더욱 익숙해졌다. 다양한 앱과 서비스 등 최신기술을 능숙하게 향유하고 자랑스러워하며, 친구나 지인들과 집에서의 모임도 늘어나고 있었다.
이런 고객의 삶의 변화는 가전제품 사용행태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이며, 우리는 어떠한 준비를 해야 하는가. 이 문제를 위해 한국과 미국의 고객 만여 명의 생활을 면밀히 데이터로 기록하고, 다양하게 분석해 고객의 가전생활을 구성하는 요소를 구조화하고, 변화 방향성을 조망했다.
그 결과 냉장고가 고객의 마음을 파악해서 알아서 최적의 색깔로 변신한다는 이상적 지향점을 설정했다. 그것을 구현가능한 적정 기술로 거꾸로 현실화(Back-casting)해 고객이 이사, 인테리어, 변심 등의 이유에 맞게 색상 조합을 자유롭게 바꿀 수 있고, 계절별로, 이벤트별로 고객의 취향을 반영해 엄선된(Curated) 색상을 골라 쓸 수 있는 무드업 냉장고를 기획하고 출시하게 됐다.
특히 창의적 사고과정을 통해 보급형 TV에 쓰이는 일반적 발광다이오드(LED)와 도광판을 활용해 자유로운 색상변환 기능을 구현했다. 이를 통해 음식을 잘 보관해주는 기능적 가치를 기본으로 음식을 즐기는 시간과 과정경험이라는 상징적 가치를 접목했고, 가전제품의 정체성의 변화와 함께 새로운 가전생활 양식을 제안했다.
◇맺음말
기업이 당면한 문제들은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다. 인간의 직관과 창의성은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결정적이고 위대한 힘을 발휘해 왔다. 하지만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이 갈수록 더 복잡해지고 모호해지면서 오롯이 직관과 창의성에 기대기에는 한계가 있음이 분명하다.
복잡하고 모호한 문제의 해결은 여러 구성권이 함께 참여하는 정립된 프로세스의 도움을 받아 더 잘 해결할 수 있다. 문제의 핵심을 파악해 재정의하고, 풀 수 있는 문제로 구조화해 바람직한 미래 모습을 설정해야 한다. 이어 도전적인 아이디어를 도출해서 고객 가치라는 잣대로 엄정히 평가한 다음, 우리의 상황에 맞게 최적화하는 것.
어쩌면 누구나 다 알 법한 기본에 다시 한번 충실해 보는 것이 복잡한 오늘의 환경 속에서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 잘 풀어낼 수 있는 열쇠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철배 LG전자 CX센터장 부사장 cxcenter@lge.com
〈필자〉이철배 LG전자 부사장은 전사 관점의 고객경험(CX) 혁신과 상품·서비스·사업모델 기획 등을 통한 CX혁신 가속화를 추진하는 CX(Customer eXperience)센터를 맡고 있다. 1993년 LG전자(옛 금성사) 입사 이래 CX 기반 디자인 정체성 확보, 경쟁력 강화 및 다양한 비즈니스 혁신 기회를 발굴한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LG전자 이노베이션사업센터장, 뉴비즈니스센터장, 디자인경영센터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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