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내공 30년’ 박혁권 “연기는 본질 찾아내는 과정”[이현정의 프리즘]

2023. 10. 25.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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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마·불륜남·검술사…캐릭터 찰떡 소화
무대 공포증에 울던 연기학도의 대반전
‘시실리 2㎞’로 희망얻고 ‘하얀거탑’으로 날아
배우 박혁권이 7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헤럴드경제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임세준 기자

[헤럴드경제=이현정 기자]그야말로 변화무쌍하다. 드라마 ‘힙하게’의 연쇄 살인마, ‘재벌집 막내 아들’에선 재벌가를 농락하는 투자 전문가,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의 1인 2역 쌍둥이 검술 무사, ‘하얀거탑’의 처세술 강한 대학병원 교수…. 배우 박혁권의 연기 스펙트럼은 광범위하다. 역할은 매번 다르지만 특유의 능청스러움에서 묻어나는 내공 깊은 연기는 한결 같다. 헤럴드경제는 최근 서울 종로구 부암동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처음부터 배우 생활을 생각한 건 아니었어요.”

박혁권은 어릴 때부터 배우를 꿈꾸지는 않았다. 그저 소소한 관심으로 연극을 보거나 고등학교 연극반에서 활동하는 정도였다. 사춘기가 찾아와 돌연 고등학교를 중퇴했을 때도 연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딱히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접한 극단 모집 광고는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꿨다. 엉겁결에 극단 생활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연기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덕분에 대학 진학도 했다. 그렇다고 연기를 천직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남 앞에 서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는 “연기 연습하러 학교에 가면 너무 긴장해서 신진대사가 잘 안될 정도였다. 침샘에서 침조차 나오지 않더라”며 “연습이 끝나면 밖에서 혼자 울고 들어올 정도였다”고 털어놨다.

그럼에도 연기를 그만두지 않은 건 오롯이 ‘오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만둘거면 재능이 없다는 걸 확실히 인정하고 그만두려고 했다”며 “그렇게 마음을 먹고 연기하다 보니 열심히 하게 됐고, 몇 년이 지나니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연극을 하면서 ‘아르바이트가 아닌 본업으로 먹고 살자’는 목표가 생겼다”고 덧붙였다.

느리지만 우직하게 목표를 향해 달려갔다. 잠깐 얼굴을 비추는 단역부터 시작해 점점 극중 비중이 높아졌다. 데뷔 초 그에게 전환점을 마련해준 작품은 지난 2004년 개봉한 코미디 영화 ‘시실리 2㎞’. 스님 출신 삭발 머리 조폭으로 분해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박혁권은 “그 전까진 영화사에 프로필을 돌리러 가면 ‘(프로필을) 놓고 가세요’의 반응이 주를 이뤘는데 ‘시실리 2㎞’ 이후론 ‘아, 그 분이시구나. 커피 드실래요?’ 정도로 바뀌었다”며 웃었다. 그러면서 “영화 주인공인 임창정 씨가 당시 오디션에서 제 연기를 보고 적극 추천해줘서 같이 할 수 있었다”며 고마움을 나타냈다.

연기 인생 바꾼 ‘하얀거탑’

‘시실리 2㎞’가 그의 첫 전환점이었다면 드라마 ‘하얀거탑’은 그를 본격적으로 시청자들 눈에 들게 한 작품이다. 지난 2007년 안판석 감독이 연출한 이 작품은 전국 시청률이 20%를 넘으며 큰 사랑을 받았다. 극중 처세술에 능한 홍상일 교수로 등장한 박혁권 역시 대중들에게 크게 각인됐다. 그는 “제 기준에 제 첫 드라마는 ‘하얀거탑’이라며 애정을 드러냈다.

그는 “‘하얀거탑’ 이후로 휴대폰 요금을 밀리지 않고 낼 수 있었다”며 “그 전까진 핸드폰 요금이 자주 끊겨서 종종 아르바이트를 나가기도 했다”고 말했다. 본업으로 먹고 살겠다는 그의 목표를 이뤄준 작품이 ‘하얀거탑’인 셈이다.

그는 ‘하얀거탑’ 외에도 드라마 ‘아내의 자격’, ‘세계의 끝’, ‘밀회’ 등 안 감독의 작품에 연이어 출연했다. 이른바 ‘안판석 사단’이라고 불릴 정도다.

배우 박혁권이 7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헤럴드경제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임세준 기자

“안 감독님은 ‘저 장면에서 이런 그림을 만든다고?’ 할 정도로 놀라운 능력이 있으신 분”이라며 “안 감독님의 좋은 작품에 참여할 수 있어 늘 뿌듯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감독님이 무서워서 연락을 먼저 잘 못하는데, 저번에 감독님께 문자 드렸더니 답이 없으셨다. 절 버리신 것 같다”며 우스개를 던졌다.

박혁권은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면서도 유독 남편이나 아버지 역할을 자주 맡았다. 싱글임에도 이러한 역할을 자연스럽게 소화하는 비결을 묻자 그는 조카를 언급했다.

그는 “가족을 꾸린 경험이 없으니 아버지 역할을 할 때 공감하기가 어렵다”면서도 “주변에서 본 것을 도입하거나 조카에 대한 감정을 크게 증폭시켜서 연기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세 살배기 아들을 둔 아버지로 분한 2부작 단막 드라마 ‘아이를 찾습니다’를 꼽았다. 이 작품은 잃어버린 아들을 11년 동안 찾아다니는 절절한 부성애를 그린다.

박혁권은 “배우 생활을 하면서 그 정도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다”며 “그런 연기를 해볼 수 있어서 좋았던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연기 재미? 본질 찾아내는 과정”

겉으론 외향적인 성격으로 보이지만 사실 그는 내성적이기 짝이 없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 앞에선 낯가림이 극에 달한다. 그는 “팬 분들이 저를 알아보면 감사하면서도 창피하고 쑥스럽다”며 “너무 어색한 마음에 자리를 피하고 싶은 맘이 커진다”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러나 혼자 있을 땐 자유로운 영혼이다. 태국에서 한 달을 무작정 살다가 돌연 부산에 임시 거처를 마련해 지내기도 했다. 태국 여행에서 우연히 무에타이를 접한 후 킥복싱에도 빠져 있다. 내년에 열리는 아마추어 대회의 출전을 진지하게 고려할 정도다.

그는 “스스로를 어른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며 “어른이 되면 재미가 없을 것 같아서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또 “남에게 피해주지 않고 어느 정도 자기의 삶을 챙기는 정도면 충분하다”고 덧붙였다.

배우 박혁권이 7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헤럴드경제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임세준 기자

새로운 사람은 낯설어 하면서도 새로운 곳을 즐기는 건 아마 사람 구경을 즐기기 때문이리라. 그는 학창 시절에도 버스로 20분이면 갈 거리를 굳이 걸어가며 사람 구경하는 걸 즐겼다. 이러한 성향은 그의 연기 생활에도 큰 도움이 됐다.

그는 “평소 어떤 본질이나 근본적인 이유를 찾아내는 걸 좋아한다”며 “예컨대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지?’라고 스스로 묻거나 누군가의 행동의 근본적인 원인을 정확히 짚었을 때 쾌감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캐릭터를 연구할 때도 마찬가지”라며 “말과 행동의 근본적인 이유를 생각하며 캐릭터의 목표를 찾는 것이 연기의 기본”이라고 강조했다.

연기 생활을 한 지 30년. 그가 추구하는 배우 생활의 방향성 역시 연기의 본질에 맞춰져 있다.

“제가 연기 공부할 때 할리우드 배우 로버트 드 니로, 메릴 스트립, 국내에선 김혜자 선생님과 신구 선생님의 작품을 교재로 삼았어요. 제가 죽은 뒤에라도 언젠가 후배들이 제 작품을 보고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연기를 잘하지? 미친 것 같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의 작품을 해보고 싶어요. 그러면 작업하는 사람으로서 행복할 것 같아요.”

ren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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