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생존 비법을 아는가
[[휴심정] 김용규의 숲과 지혜]
군말 없이 신의 숙제를 푸는 여름꽃(2)
향기로 자신을 드러내다
밤꽃, 너는 왜 그토록 압도적인 향기를 풍기느냐?
다음은 여름, 그 가장 안전한 시절의 뒷면을 이루고 있는 숙제, 즉 치열한 경쟁이라는 문제를 향기라는 방법으로 풀어내는 존재들을 만나보자. 여름철에 향기로운 꽃 하면 떠오르는 식물에 무엇이 있는가? 당신이 떠올린 목록에 혹시 밤나무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밤나무가 섭섭할지도 모르겠다. 사방팔방 가시가 돋아 있는 밤송이와 밤 맛은 명확하게 기억하면서도 정작 밤꽃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언젠가 누군가로부터 밤꽃 향기가 남자들 정액 냄새와 비슷한 아주 독특한 향기를 풍긴다는 풍문을 들은 듯하다면서도, 그 꽃이 정작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현대인들이 자연으로부터 멀어져 밤나무를 만나는 일이 드물기도 해서겠지만, 결정적으로는 밤꽃 자체가 인간의 뭇시선을 끌어당길 만큼 찬란하게 피는 꽃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밤나무는 색(色)이나 모양(形)보다는 오히려 향기(香)에 더 공을 들여 꽃을 피우는 식물이다. 멀찍이 서서 사람들에게 ‘저게 밤꽃입니다’라고 일러주면 많은 사람이 어리둥절해 한다. 가까이 가서 긴 꼬리 모양을 달고 있는 꽃을 짚으며 ‘이게 밤꽃입니다’라고 가리키면 종종 되묻는 사람들이 있다. ‘이게 꽃이라고요?’ 그 모양이 일반적인 꽃과 너무 달라서 드는 의문일 것이다. 일반적인 꽃 모양과는 매우 다르지만, 그 향기는 소문처럼 특별하고 또한 압도적이다. 이 강렬한 향기는 밤나무의 수꽃이 피우는 향기다. 그렇다면 암꽃은 어디에 있을까?
사람들에게 다시 물어본다. ‘이렇게 길쭉한 꽃에서 어떻게 그토록 완벽하게 동그란 밤송이(열매)가 만들어질까요?’ 질문을 받은 사람들 대부분은 ‘그러게요 ’하며 의아해한다. 그러면 나는 밤나무의 앙증맞은 암꽃을 가리키며 자세히 살피게 한다. 밤나무는 암수한그루(雌雄同株)지만 암꽃과 수꽃이 따로 떨어져서 피는 두집꽃(二家花)이다. 밤나무의 수꽃은 기다란 꽃자루를 따라 줄지어 피어난다. 암꽃은 긴 꽃자루의 안쪽, 혹은 보는 위치에 따라 위쪽에 핀다. 요컨대 꽃자루 상단에는 총포(總苞, 꽃싸개)로 감싼 암꽃을 피우고, 그 아래쪽으로는 간격을 약간 띄어 아주 많은 수꽃을 다닥다닥 매달 듯이 피운다.
한여름에 밤꽃의 그 독특한 향기를 특별히 사랑하는 생명은 꿀벌이다. 꿀벌을 사육하는 양봉 농가가 이 시기에 밤꽃으로부터 수집된 꿀을 별도로 채밀하여 ‘밤꿀’이라는 이름을 단 상품으로 따로 판매할 만큼 밤나무의 꽃은 단일 식물로는 막대한 양의 꿀을 생산한다. 7~8월에 피는 밤꽃은 한여름, 앞다퉈 피는 여러 식물의 치열한 경쟁환경을 자신만의 독특한 향기로 극복하면서 피는 꽃의 전형이다. 그들은 짙어진 녹음 속에서 매개자들에게 자신의 위치를 손쉽게 알리는데, 그 방법은 바로 압도적인 향기를 풍겨 벌을 부르고 또한 그들에게 넉넉히 생산해둔 꿀을 아낌없이 나눠주는 것이다.
칡꽃, 탄압받으면서도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
한편 강도 높은 여름 숲의 경쟁환경을 향기와 꿀로 이겨내는 또 다른 식물로는 칡덩굴이 있다. 칡꽃을 본 적이 있는가? 칡꽃을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 칡은 높은 광량이 보장되는 땅에서 싹트고 자라는 식물이다. 따라서 칡덩굴은 울창하고 깊은 숲에서는 만나기 어렵다. 오히려 하늘이 환하게 열린 공간을 더듬어야 만날 수 있다. 예컨대 산기슭, 혹은 숲과 붙어 있는 농경지의 경계면, 아니면 도로를 닦느라 산을 절개하면서 발생한 경사면, 또는 무덤 근처처럼 인간이 인위적으로 개입함으로써 갑자기 하늘이 열린 공간으로 가야 한다. 아니면 길가나 제방 같은 터에서 만날 수 있다. 칡이 열린 공간을 넓게 뒤덮으며 땅과 햇빛을 차지해 나가는 방식은 덩굴을 형성하는 것이다. 덩굴로 뻗어 나가는 줄기가 어느 정도 멀리 뻗어 땅에 닿으면 그 자리에서 새로운 뿌리를 내린다. 짐승에게 뜯어먹히거나 사람들의 낫질에 잘려나가도, 혹은 괭이질에 뿌리(葛根)가 뽑혀도 새로 뻗어놓은 다른 자리의 뿌리를 통해 삶을 영위해 갈 수 있다. 한편 영역을 확장해 가는 과정에서 주변에 큰 풀이나 높은 나무가 있으면 그들을 휘감으면서 타고 오르기도 한다. 드넓게 덩굴로 뻗어가든, 누군가를 타고 오르든 모두 빛을 향해 살 수밖에 없는 제 고유성을 실현하는 방식일 뿐이다.
칡의 이런 모습 탓에 ‘숲 가꾸기’ 등 산림을 관리하는 현장 전문가들은 칡을 ‘폭목(暴木)’이라 취급하기도 한다. 하지만 부연하건대 이런 모습은 칡이 폭력적인 식물이어서가 아니라 빛을 향한 강렬한 본성을 추구하는 데서 비롯한 이 생명의 진화적 선택일뿐이다. 생명을 대하는 우리 인간의 눈은 어떤 점에서 보면 대단히 편협하고 자기중심적이다. 달리 보면 오히려 인간이야말로 지구에서 가장 폭력적인 종이다. 전 지구적으로 문명의 발상지 대부분에서는 숲이 사라졌고 끝내 사막으로 변했다. 문명 이후 인간의 생태발자국(Ecological Footprint)은 그 어느 생명의 그것과 견주기 어려울 만큼 막대해졌다.
우리 인간은 자주 조물주의 눈높이로 도약하여 생명을 보려 애써야 한다. 조물주의 눈으로 본다면 칡도, 칡이 휘감고 올라가는 그 어떤 나무도 모두 대등한 생명일 뿐일 것이다. 생명 저마다는 다만 그들 고유의 길이 있고 그 길에서 극복해야 할 절박한 사정이 있을 뿐이다. 독사는 독사의 길을 가고, 꽃뱀은 꽃뱀의 길을 갈 뿐이다. 그들 모두 자신의 서식지에 놓인 삶의 숙제를 풀며 자기 삶을 완성해 가는 것이다. 우리가 생명 타자를 자기중심적으로 분별하여 선과 악, 또는 유·불리한 대상 수준으로 나누어 보는 시선은 인간을 위해서도 불행한 관점이다. 생명 타자만이 아니라 마침내 인간 자신들에 대하여도 그러한 이분법적 시선과 잣대를 들이대게 되기 때문이다. 그 시선과 잣대에 의해 차별과 배제, 혐오와 폭력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칡덩굴은 잎사귀가 비교적 큰 편이다. 이는 그들이 빛을 더 많이 포착하려는 방법이다. 칡의 잎은 게다가 삼출복엽(三出複葉, 하나의 잎자루에 세 장의 낱 잎사귀를 펼치는 잎 구조)이다. 따라서 여름의 특성뿐만 아니라, 자신의 큰 잎 때문에라도 꽃을 드러내는 일이 쉽지 않다. 더 잘 드러나기 위해 칡꽃의 꽃자루는 위쪽을 향한다. 밤꽃이 쓰는 방법처럼 긴 꽃자루를 따라 보라색 꽃들을 아래로부터 위로 차례차례 다닥다닥 피우는데, 꽃 가까이 가면 꿀 향기가 짙게 묻어난다. 칡꽃은 곤충과 벌레들에게 고마운 여름 밥상 노릇을 하며 결실을 본다. 칡은 아까시나무와 같은 콩과식물, 콩과식물이 다 그렇듯 그들의 열매는 모두 꼬투리다.
아까시나무꽃, 그 특별하고 출중한 향기
여름이 막 시작될 무렵에 비슷한 전략으로 주로 벌을 공략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식물이 또 있다. 아까시나무가 그 주인공이다. 이미 녹음을 향해 질주해 가는 초여름의 숲, 다른 식물들이 앞다퉈 틔워낸 잎사귀들은 꽃을 찾아 나서는 곤충들의 시야를 방해할 수 있다. 아까시나무꽃의 향기는 이런 시각적 방해를 극복하는 데 있어 매우 출중하다. 포도송이를 닮은 꽃차례에 우윳빛으로 피어나는 꽃의 그 특별한 향기와, 그 안의 꿀맛을 직접 체험한 사람들이 많을 테니 부연이 필요 없을 것이다.
쥐똥나무, 작지만 누구보다 그윽한 향기를 품은 여름꽃
특별한 향기와 꿀로 여름날의 경쟁을 이겨내는 식물로는 위에 든 예 외에도 누리장나무나 싸리나무, 능소화나 쉬나무, 꿀풀, 그리고 쥐똥나무 등을 들 수 있다. 그중에서도 볼품없이 작은 꽃을 피우는 쥐똥나무는 특별히 언급해 두고 싶다. 쥐똥나무는 그 열매가 쥐똥처럼 생긴 데서 비롯한 이름이다. 정확히 쥐똥을 닮아서 쥐똥처럼 작고 검은색이다. 따라서 그 우윳빛 꽃도 아주 작은 편이다. 대략 2~3m 높이까지도 자라는 쥐똥나무는 우리나라 전국의 숲에 서식한다. 하지만 도로의 경계나 화단의 경계 등에 울타리처럼 군락으로 심어 가꾸고 있어 도시에서도 흔하게 만날 수 있다. 그 꽃은 6월 녹음이 짙어지는 계절에 밥알보다 작은 크기로 핀다. 따라서 사람의 시선을 끌어당기거나 사로잡지는 못하는 편이다. 하지만 여러 송이가 모여서 핌으로써 자신을 드러내려 애쓰고, 또한 아주 아름다운 향기를 풍김으로써 매개자를 유혹하고 초대한다. 치열한 여름, 그 작은 꽃을 피우면서도 기어코 매개자를 불러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비법은 바로 다른 꽃은 흉내 내기 어려운 그윽한 향기를 쥐똥나무는 기어코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몇 꼭지의 연재를 통해 꽃의 색과 모양에 이어 향기의 계책으로 여름날의 뜨거운 경쟁을 이겨내는 식물을 살펴보았다. 다음으로는 시간의 마법을 계책으로 쓰는 식물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김용규(충북 괴산, 여우숲 생명학교 교장)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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