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현대 공존 모색하는 지역 작가들…‘추풍미담’으로 깊어가는 행궁의 밤
1794년 가을에 증축된 수원 화성행궁 유여택. 스산한 바람 부는 계절에 지어졌기 때문일까. 가옥 곳곳에 깃든 시대의 기운과 흔적이 동시대 현대미술과 만나면서 피어나는 교류의 감각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온다.
야간개장이 진행 중인 수원 화성행궁 유여택에선 수원과 인연을 맺은 지역 작가들의 고민이 한데 모인 특별한 기획전 ‘추풍미담:秋風美談’전이 관람객과 소통의 장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번 기획전은 국립현대미술관과 문화재청 덕수궁관리소가 2012년부터 네 차례에 걸쳐 진행했던 ‘덕수궁 프로젝트’처럼 오랜 역사를 지닌 전통 가옥이 동시대에 어떤 공간이 될 수 있는지 탐구하는 기회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특히 화성행궁에서 공간과 구조물 내부로 현대 미술 작품들이 유여택 내부 공간에 스며드는 방식으로 기획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고창선, 김아라, 송태화, 이선미, 전경선, 정철규, 최범용 등 총 7명의 작가들이 공간을 대하는 가치관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유여택은 이제 전통과 현대, 그 어느 쪽도 우세하거나 뒤쳐지지 않은 채 끊임없이 진동하는 새로운 시공간이 됐다.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모두 수원 지역을 잘 알고 있다. 저마다 수원과 화성과 안산에서 활동해왔지만, 어린 시절을 수원에서 보냈거나 수원에서 나고 자라는 등 모두 수원 지역과 연결고리를 끌어 안은 채 지역에서 활발히 행보를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전경선 작가의 나무 조형물은 현대인들의 내면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조각들이 유여택의 목재와 빛에 물들어가면서 정조의 내면과 관람객들의 내면이 연결되는 계기가 피어난다. 전 작가의 작품을 감싸는 조명은 전시를 위해 새롭게 설치하지 않았고, 기존 유여택을 비추던 조명을 사용했기 때문에, 그간 유여택에 깃들어 있던 빛이 작품과 새롭게 만날 때 의미가 재편될 수 있다.
창틀, 처마 등 한옥 구조를 뜯어보고 연구하는 김아라 작가의 ‘Untitled’는 다채로운 전통색의 사각 패턴이 추상 회화의 질감을 만들어내고 있다.
김 작가는 “캔버스를 벽면에 바짝 붙여 버리면, 벽화처럼 느껴지고 공간으로 수렴하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적절히 각도를 내서 공간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빈틈과 여지가 있어야 한다”며 “작업이 공간을 잠식해도 안 되고, 공간이 작품의 생명력을 죽여도 안 된다. 작품과 공간 각각의 존재감을 함께 끌고 가면서 장소의 의미를 새롭게 확장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설명한다.
발길을 옮기면 송태화 작가의 ‘여행’을 마주한다. 사도세자가 갇혀서 쓸쓸하게 죽어갔던 뒤주. 그 뒤주가 송 작가의 손을 거쳐 어떻게 재탄생했을까. 그는 유여택에 설치해놓은 기존의 뒤주에 모니터를 넣어 영상을 송출한다. 선로를 달리는 기차, 굽이치는 파도가 뒤주 덮개의 거울을 거쳐 관람자와 만난다. 삶과 죽음이 각자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생각하는 교류의 장이 펼쳐진다.
유여택 중앙에는 최범용 작가의 ‘꿈(정조의 꿈)’이 꿈틀대고 있다. 원형의 틀 위에 채색된 물감들이 정조가 꿈꿨던 세계를 떠오르게 만드는 상상지대가 된다. 밤이 되면 조명으로 인해 낮과는 다른 모습이 되는 만큼, 작품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작품이 내뿜는 에너지도 달라지는 순환 구조가 만들어진다.
경수미 총괄기획자는 이번 전시에서 지역 작가들을 섭외하면서 공간과 사람이 연결되는 방식에 관해 끊임없이 고민했다. 그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건 특히 외부인이 아니라, 지역과 접점을 머금은 작가들을 한데 모으는 일이었다. 공간은 논하려면 결국 그 공간을 잘 이해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에서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경수미 기획자는 “특정 공간에 어울리도록 과도하게 작품의 톤과 소재를 조정하면 오히려 매력이 없어진다. 어느 한 쪽에 맞추면 오히려 두 영역의 매력이 모두 반감될 수 있다는 점을 의식하면서 준비했다”며 “공간을 다루는 데 있어 중요한 건 결국 공간을 점유하는 이들의 생각과 가치관이다. 작가들이 애정 어린 시선으로 풀어낸 작품들이 단절된 과거와 현재를 잇는 마중물로 작용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시는 29일까지.
송상호 기자 ssho@kyeonggi.com
Copyright © 경기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부천시 “‘물 복지 향상’ 위한 시민 체감 상하수도 정책 집중 추진”
- “수고했어 우리 아들, 딸”…“수능 끝, 이제 놀거에요!” [2025 수능]
- EBS·입시업계 "국어, 킬러문항 없었다…작년 수능보다 쉬워" [2025 수능]
- 임태희 경기도교육감, "꿈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세요" 수능 수험생 응원 [2025 수능]
- 용인 고림동서 직장 동료에 흉기 휘두른 필리핀 근로자
- 허종식 의원 선거법위반 혐의 첫 재판…변호인, “허위 글 아니다”
- 경기아트센터 무용단 '직장 내 괴롭힘'으로 감봉 1개월...'솜방망이 처벌' 논란
- 경기도 기업 제조 활로 국제실내양궁대회 1~3위 석권
- 경기도수원월드컵재단 인사 적체·급여체계 ‘도마위’
- 상생협의체 "배민·쿠팡 중개수수료 9.8%에서 2.0∼7.8%로 차등 적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