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버전 재탄생한 오페라들…‘희생하는 여성’ 도식 탈피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을 위해 희생하다 죽어가는 이야기. 거칠게 요약하면 수많은 오페라의 내용이 이렇다. 시대가 바뀌고 감수성이 변화하면서 최근 제작 오페라들은 이런 도식을 탈피하는 연출을 종종 선보인다. 올가을 국내 오페라 무대에서 이런 흐름이 뚜렷하다.
예술의전당이 전관 개관 30돌을 기념해 26일~29일까지 공연하는 빈센초 벨리니(1801~1835)의 오페라 ‘노르마’는 결말을 일부 바꾼다. 여사제 노르마는 정복자인 로마 총독과 사랑에 빠져 아이까지 낳지만, 남자의 배신에 불구덩이에 몸을 던져 스스로 화형을 선택한다. 이번 연출에선 노르마가 아버지가 쏜 총에 맞아 죽는 것으로 각색했다. 2016년 영국 로열 오페라하우스 시즌 개막작을 가져왔는데, 역시 이런 설정이었다. 연출가 알렉스 오예(63)는 지난달 간담회에서 “여사제가 사랑하고 아이를 낳은 것이 화형에 처할 정도로 잘못된 일이냐”며 “전통의 틀에서 벗어나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면 오페라는 과거에 머물게 된다. 현실을 반영하는 각색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노르마의 아버지 오로베소 역의 베이스 박종민(37)은 지난 16일 간담회에서 “이번 연출에서 노르마가 죽음을 맞는 방식은 현대인도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오는 26~29일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오르는 자코모 푸치니(1858~1924)의 오페라 ‘투란도트’도 현대 감각에 맞춰 기존 설정을 비틀고 강조점을 달리한다. 세계 오페라 무대에서 주목받는 테너 이용훈(50)의 국내 데뷔작이다. 투란도트 공주가 낸 수수께끼를 풀고 결혼에 성공하는 칼라프 왕자의 해피엔딩 스토리가 이번 연출에선 비극적 결말로 대체된다. 이 작품으로 첫 오페라 연출에 나선 연극·마당놀이의 대가 손진책(76)은 지난 19일 간담회에서 “볼 때마다 결말이 이상하게 느껴졌다”며 “사랑을 경험해본 적 없는 공주가 갑자기 사랑에 빠진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유럽에서도 ‘투란도트’의 결말을 변형하는 색다른 연출이 많다. 투란도트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연출, 칼라프를 사형시키는 해석도 나왔다. 독일 드레스덴 젬퍼 오페라극장은 지난달 신작 ‘투란도트’에서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을 접목했다. 오징어 게임과 비슷한 ‘투란도트 서바이벌 게임’에서 승리해야 투란도트의 수수께끼를 풀 기회를 얻는다는 설정이다. 여기에 칼라프 왕자로 출연했던 테너 이용훈은 지난 19일 간담회에서 “무대에서 줄다리기와 양궁까지 했는데 관객들이 정말 좋아했다“며 “원작의 대본이나 음악을 변형하는 것은 작곡가에 대한 존중에서 어긋나지만 새로운 해석과 시도 또한 중요하다”고 말했다.
지난 6~7일 대구오페라하우스가 개관 20돌 기념으로 올린 ‘살로메’는 엽기, 퇴폐, 괴기에 패륜을 뒤섞은 막장 드라마에 가깝다. 나체춤에 참수, 근친상간 등 갖가지 금기를 담은 오스카 와일드(1854~1900)의 희곡이 원작. 리하르트 슈트라우스(1864~1949)가 여기에 관능적인 불협화음을 입혀 1905년 초연한 오페라는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뉴욕 메트 오페라가 27년이나 공연을 금지할 정도였다. 지금은 세계 각지에서 다양하게 변형시켜 자주 공연하는 인기 오페라다. 어머니가 죽은 아버지의 동생과 재혼하면서, 삼촌에서 의붓아버지로 변한 헤롯왕은 춤을 춰달라며 집요하게 추근거린다. 예언자 세레요한의 목을 요구하며 살로메가 헤롯왕 앞에서 추는 ‘일곱 베일의 춤’이 가장 유명한 장면. 소프라노 가수나 전문 무용수가 일곱 베일을 차례로 벗으며 육감적인 춤을 추는 게 전형적인 연출이다. 이번 대구 공연에서 옷을 벗는 인물은 살로메가 아니라 헤롯왕이다. 춤도 살로메 혼자가 아니라 헤롯왕과 함께 추는 2인무다. 여성은 춤추고 남성은 이를 감상한다는 원작을 변형시킨 것이다. 오페라 전문가 이용숙 평론가는 “시대적 감각이 달라지면서 이 장면을 새롭게 연출하는 게 대세“라고 말했다.
대구오페라하우스가 지난 20·21일 공연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엘렉트라’는 어머니와 자매 등 3명의 여성이 이야기를 끌어간다. 원작인 소포클레스의 그리스 비극이 ‘최초의 여성극’으로 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친모살해란 자극적 소재에 전위적인 관현악, 성악가 캐스팅의 어려움 때문인지 그동안 국내에선 접할 수 없었다. 이런 오페라를 국내에서 초연했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다.
성남아트센터가 지난 12일부터 사흘 동안 선보인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의 변형은 파격적이다. 오지 않을 남편을 기다리다 비극적 최후를 맞는 일본인 게이샤 초초상 이야기의 배경은 일본 나가사키 항구다. 패션 디자이너 출신의 무용 연출가 정구호(58)는 이 작품의 배경을 서기 2576년 우주로 설정했다. 엠포리오 행성의 사령관 핑커톤이 평화 협상을 위해 파필리오 행성으로 갔다가 초초 공주를 만나 벌어지는 이야기로 줄기를 완전히 바꿨다. 다만, 아리아 가사는 그대로인데 자막만 바꿔 억지스럽다는 평도 일부 나왔다.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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