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정원 ‘2배 확대’ 대환영한 독일 의사협회 [김누리 칼럼]
유능할 뿐 아니라 성숙한 의사 길러내는 독일
김누리 중앙대 교수(독문학)
“천하의 빨갱이도 독일 병원에서 한달만 지내면 빨간 물이 완전히 빠질 거야.”
독일에서 연구년을 보내고 돌아가는 교수가 노회한 공안 검사 말투를 흉내 내며 웃었다. 그의 딸아이는 어깨 쪽 쇄골에 문제가 생겨 독일에 있는 내내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받았다. 지금도 독일 병원을 생각하면 30여년 전 그가 한 말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한국 유학생이 높은 곳에서 추락하여 내장이 심하게 파열된 사고도 기억난다. 그의 생명을 구한 건 베를린 의대 의사들의 필사적인 헌신이었다. 수많은 의사가 매달려 수차례 수술 끝에 사망 직전의, 신분증도 없는 ‘무연고 아시아인’을 살려냈다.
폐병 치료를 위해 요양원을 다녀온 유학생 얘기도 전설처럼 떠돌았다. 지독한 골초였던 이 학생은 무려 반년간 아름다운 남부 지역 요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우리는 “조금만 더 열심히 피우면 멋진 요양원에 갈 수 있어” 따위의 농담을 주고받으며 낄낄거렸다.
실로 우리가 경험한 독일의 의료체제는 경이로웠다. 우선 모든 치료가 무료다. 일년 내내 쇄골 치료를 받은 교수의 딸도, 베를린 의대에서 내장 파열로 대수술을 받은 유학생도, 폐병을 앓아 요양원에서 치료받은 골초 학생도 병원에 한푼의 치료비도 더 지불하지 않았다. 약값도 모두 무료였다.
퇴원할 때 오히려 돈을 받고 나오는 경우도 흔하다. 긴급 상황에서 병원에 오는 데 사용한 교통비 등을 돌려받기 때문이다. 부가 서비스도 대부분 무료다. 예컨대, 아이를 출산하면 퇴원 이후 조산사가 일주일에 한 차례 집을 방문하여 아이의 상태를 점검하고 육아 정보를 제공한다. 필요한 경우 유축기 등도 무료로 빌려준다.
그러나 이러한 의료체제보다 내게 더 큰 감동을 준 것은 독일 의사들이다. 한번은 축구를 하다 크게 다쳤다. 상대편 골키퍼와 정면으로 부딪쳐 얼굴 광대뼈가 함몰된 것이다. 수술을 위해 국부마취를 한 상태에서 의사는 내게 끊임없이 수술 과정을 설명했다.
크기 순서로 쭉 늘어놓은 갈고리처럼 생긴 기구들을 보여주며 “이번에 이 갈고리가 들어가서 함몰된 뼈를 걸어서 밀어 올릴 거예요. 그게 끝나면 엑스레이 사진으로 상태를 확인하고, 이 작은 갈고리로 미세 조정을 할 겁니다”라는 식이다. 환자의 불안을 줄여주려고 끝없이 말을 해대는 의사가 참으로 신기하게 느껴졌다.
복통이 심하다는 처와 병원을 찾았던 경험도 잊히지 않는다. 처를 진료하던 의사는 대기실에 앉아 있는 나를 치료실로 불렀다. 초음파로 아내의 배를 진찰하고 컴퓨터 화면을 보면서 그는 연신 말을 이어갔다. “당신은 참으로 행운아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배 속이 깨끗한 아내와 살 수 있는 거지요.” 독일인답게 어눌한 농담을 던지는 그에게서 환자 가족의 불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려 애쓰는 진심을 읽을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의사들을 길러낼 수 있었을까?’ 늘 궁금했다. 아들이 베를린 샤리테 병원 의사인 만프레트 카펠러 베를린 공대 교수에게 ‘독일 의사들이 한결같이 친절한 이유’를 물었다. 그는 ‘성적’보다 ‘적성’을 중시하는 의사 선발 과정과 의료윤리를 강조하는 교육과정을 이유로 들었다.
의사 선발 과정에서 무엇보다 의사로서의 성격적 적합도를 중시한다는 것이다. 적성과 인성검사를 이틀에 걸쳐 치른다고 했다. 독일 의사들의 성숙한 태도는 철저한 의료윤리와 의료언어 교육 덕분이라는 말도 했다.
그때 독일 의사들을 떠올리며 한국 의사들을 생각한다. 특히 충격적인 것은 코로나 팬데믹에 대응하는 대조적인 태도다. 인구수당 의사 수가 한국보다 두배 넘게 많은 독일에서 정부는 의대 정원 두배 확대라는 파격적인 대책을 내놓았고, 독일의사협회는 ‘대환영’의 뜻을 밝혔다.
반면 한국 의사들은 공공병원 확충을 위해 의대 정원을 겨우 400명 증원하려던 정부에 ‘진료 거부’와 ‘시위’로 맞섰고, 결국 정부는 의대 정원을 단 한명도 늘리지 못했다.
현 정부가 의사 정원 확대를 기반으로 필수의료와 지방의료를 강화하겠다고 한다. 이번 기회에 의사 정원 확대뿐 아니라, 의사 선발 방식과 의사 교육과정의 개혁도 함께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병원은 사회의 거울이자 영혼이다. 병원은 사회의 숨겨진 민낯을 드러내고,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병원이 모든 사람을 하나같이 소중히 여기고, 의사가 환자의 고통과 불안을 세심히 보살피는 사회야말로 아름다운 사회다. 이제 우리 의사도 사회를 선도하는 엘리트로서 사적 욕망을 넘어 공적 책임을 자각하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줄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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