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테코글루도 인정한 ‘손흥민 주장론’, ‘토트넘 질풍’의 원동력[최규섭의 청축탁축(清蹴濁蹴)]
중국 월나라 군주였던 구천은 ‘상담(嘗膽)’의 고사로 우리에게도 유명하다. 쓰디쓴 쓸개를 핥으면서 복수를 다짐했던 그는 끝내 설욕의 염원을 이뤘다. 회계산에서 겪었던 수치와 모욕의 망령 때문에, 잠 못 이루던 그는 마침내 숙적 부차를 패퇴시키고 오를 멸망의 길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춘추오패의 반열에 올랐다.
나라의 운명이 걸린 마지막 건곤일척(乾坤一擲)의 대회전만 남았을 때, 그가 취한 승부의 한 수는 ‘동감공고(同甘共苦)’였다. 군사들은 왕이 자기들과 ‘기쁨과 괴로움을 함께한다’는 데 감격해 몸들을 내던지며 투지를 불살랐고, 결국 승전고를 울릴 수 있었다.
결전을 앞두고, 월나라의 한 장수가 왕인 그에게 술을 한 병 올렸다. 승리를 기원하는 헌수(獻酬)였다. 구천은 그 술을 냇물에 쏟았다. 모두가 깜짝 놀랐다. 냇물에 술 한 병, 물론 술맛이 제대로 남아 있을 리가 없다. 그는 그 물을 모든 장수와 병사들과 함께 기꺼이, 또한 맛있게 나눠 마셨다.
장수의 예를 갈고 닦은 그와 사기충천한 군사들이 어우러졌으니, 그 기세는 욱일승천이었다. 오가 스러짐은 필연이었다. 그는 천하의 패자가 되며 역사의 한쪽을 장식했다. 반면 망국의 길을 걸은 부차는 초라하게 역사에서 사라졌다.
‘동감공고’하는 손흥민의 인간미, ‘1+1=2+α’ 등식 창출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EPL) 2023-2024시즌 초반 화두는 단연 ‘토트넘 홋스퍼 질풍’이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토트넘 돌풍’이 EPL을 휩쓸고 있다. 시즌 전체 일정의 ¼에 약간 못 미치는(23.7%) 9라운드가 끝난 현재, 순위표 가장 위에 자리한 팀은 놀랍게도 토트넘이다. 팬들은 물론 전문가마저도 아연케 하는 ‘토트넘 선두 현상’이다.
이번 시즌 개막을 앞두고, 토트넘은 오히려 몰락이 점쳐졌다. 최근 10시즌 가까이 주득점원으로 활약한 에이스 해리 케인(30)이 우승의 한을 풀기 위해 독일 분데스리가 으뜸 명문 바이에른 뮌헨으로 둥지를 옮긴 데 따른 자연스러운 예측이었다. “2022-2023시즌에 기록한 8위도 버겁지 않을까?”라는 조롱이 깃든 예상까지 나왔을 정도다.
그런데 이 예상을 비웃듯, 전혀 상반된 레이스가 펼쳐지는 2023-2024시즌이다. 4연패를 노리는 맨체스터 시티(2위·승점 21·7승 2패)도,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히는 아스널(3위·승점 21·6승 3무)도 모두 토트넘(1위·승점 23·7승 2무)을 우러러보고 있다. 아직 패배를 모르는 팀, 곧 토트넘이다.
과연 토트넘은 무슨 힘을 받아 이처럼 환골탈태했을까? 먼저 손꼽히는 동력은 신임 엔제 포스테코글루 감독이다. “포스테코글루 감독이 추구하는 공격 축구가 토트넘을 일신했다”라는 평가를 흔히 접할 수 있다. 포스테코글루 감독은 9라운드 풀럼전(24일·한국 시각) 승리(2-0)로 EPL 역사의 한쪽을 장식했다. 데뷔 후 9경기 최고 승점 획득 사령탑 기록의 주인공이 됐다. 종전 기록 보유자인 거스 히딩크 전 첼시 감독과 마이크 워커 전 노리치 시티 감독(이상 승점 22)을 승점 1차로 넘어섰다.
물론, 이 분석은 타당하다. 그러나 심리적 측면에서, 보다 근본적 동력이 존재한다는 분석에도 눈길이 쏠린다. 그 원동력은 다름 아닌 ‘손흥민 주장론’이다. 이번 시즌 주장의 중책을 맡은 손흥민에게서 배어 나오는 포용력이 전 선수들의 잠재력을 극대화한 데에서, 토트넘이 질풍이 계속된다는 해석이 갈수록 힘을 얻고 있음이 엿보인다.
손흥민의 인간성은 이미 정평이 나 있다. 자신을 드러내는 몸놀림보다 동료를 우선 배려하는 이타적 플레이는 EPL에서 한결같이 높게 평가받는 손흥민의 독특한 매력, 아니 ‘마력(魔力)’이라 할 만하다. 이번 시즌, 동료들의 득점이 나올 때마다 – 벤치로 물러나 있을 때에도 – 자신이 골을 터뜨린 이상으로 기쁨을 표출하는 모습은 그 대표적 일례다.
슬럼프에 빠진 동료를 다독여 정상의 몸놀림을 펼칠 수 있도록 하는 능력에서도, 손흥민은 특출하다. 침체의 늪에서 주눅 들고 주저앉지 않도록 따뜻한 마음과 손길로 일으켜 세우는 손흥민의 마음새는 곧잘 언론의 조명을 받으며 화제가 되곤 한다.
이 맥락에서, 히샬리송의 부활은 눈여겨볼 만하다. 5라운드 셰필드 유나이티드전에서, 히샬리송이 시즌 첫 골을 터뜨렸을 때 가장 기뻐한 모습을 보인 동료는 손흥민이었다. 이후 동면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켠 히샬리송은 2개의 어시스트를 추가하며 토트넘의 공격력에 힘을 싣고 있다. 지난 시즌 27경기에서 1골 3어시스트에 그쳤던 히샬리송은 이번 시즌 9경기에서 벌써 같은 공격 포인트를 수확했다.
무엇보다도 포스테코글루 감독이 ‘1+1=2+α’의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는 손흥민의 주장으로서 능력을 격찬한다. “손흥민은 우리가 이룬 많은 좋은 일의 촉매제 역으로 작용한다(He’s been a catalyst for a lot of the good stuff we’ve done)”라고 전제한 포스테코글루 감독은 “‘9월의 선수’로 선정됐음은 그런 사실을 절대적으로 인정받은 표징”이라고 ‘손흥민 주장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표명했다.
“우리 모두 알고 있듯이, 손흥민은 토트넘에서 매우 훌륭한 인물이자 리더다. 특히, 그룹 문화의 원동력이다. 자신이 그런 사실을 깨닫고 한결같이 노력하는 자세는 더욱 본받을 점이다. 또한 훌륭한 인간과 좋은 문화를 만들려고 힘쓰는 데 그치지 않고, 나아가 빼어난 성과를 내도록 애쓰는 태도는 더더욱 칭찬하고 싶다.”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를 뽐내던 초패왕 항우였건만, 결국은 스스로 생애를 마감했다. 민심과 인재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상하가 화합하지 못하면 겉으로 안정되어 보여도 속은 늘 위태롭다.”(관자) “화합하면 일당백이요, 불화하면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소용없다.”(장거정) 다 같은 맥락이다. 이번 시즌, 손흥민을 축으로 모두가 한마음을 이뤄 나가는 토트넘의 미래는 장밋빛이다.
전 베스트 일레븐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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