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 신사협정 통해 ‘정치 회복’ 첫발… ‘보여주기식 협치’ 회의적 시각도
국감장 피켓 도배… 툭하면 회의 파행
극단적 정쟁에 정치 혐오만 부채질
“한국정치 악순환 끊을 자구책 의미”
2024년 총선 겨냥 ‘반짝 쇄신’ 우려에
“여야 구두 합의 그쳐 한계” 지적도
국민의힘 윤재옥 원내대표와 더불어민주당 홍익표 원내대표는 24일 각 당의 국정감사 대책회의에서 국회 회의장 내 막말과 고성, 손 피켓을 없애기로 합의했다고 한목소리로 밝혔다. 여야가 강대강으로 대치하며 ‘정치 혐오’를 양산하고, 반복해서 터지는 상임위원회 파행 사태로 비판이 커진 가운데 정치권이 총선을 앞두고 자정 노력을 시작한 것이다.
21대 국회는 상대 당 의원을 향해 고성을 지르거나 막말을 하는 의원들의 행태가 반복되면서 정쟁에만 몰두한다는 오명을 받았다. 지난 6월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의 교섭단체대표 연설 당시 민주당 의원들이 “일본 대변인”, “땅 대표”, “거짓말쟁이”라고 야유한 게 대표적이다. 같은 달 민주당 이재명 대표 연설 때도 여당 의석에서 “죄를 지었으니까 그렇지”, “돈봉투를 안 받았어야지” 등의 비난이 나왔다.
이 같은 상황에서 여야가 내놓은 자구책을 두고 대결 정치를 완화할 수 있는 방안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이후 실종된 여야 협치의 공간을 되살릴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기대감도 있다. 그러나 여야가 내년 총선을 겨냥해 ‘보여주기식 쇄신’을 하는 것뿐이라는 회의적인 시각도 많다. 원내대표들의 구두 합의에 그칠 뿐이라 선거일이 다가올수록 상대 당 공세에 집중하는 여야의 행태는 되풀이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실제로 민주당이 11월 본회의에서 ‘노란봉투법’과 ‘방송법 개정안’을 처리하겠다고 밝히면서 대치 국면은 심화할 전망이다. 야 3당의 주도 하에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된 ‘쌍특검’(대장동 50억 클럽·김건희 여사 특검) 표결이 오는 12월에 예정돼 있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번 합의안이 대통령 시정연설과 여야 교섭단체 연설에서의 방해 행위만 금지해 한계가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의원들의 막말과 고성은 대정부질문이나 상임위원회 등 의사일정 전반에서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英·美처럼 제재 가해야
여야가 정치 개혁에 진정성을 보이기 위해선 제도 개선과 성숙한 정치 문화 정착 같은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영국이나 미국 등 선진 민주주의 국가의 의회처럼 의원의 부적절한 발언에 국회 전체가 나서 제재를 가하는 모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회 입법조사처에 따르면 영국 의회는 멍청이·거짓말쟁이·겁쟁이·배신자와 같은 단어를 ‘비의회적인 언어’로 규정하며 언급을 금지하고 있다. 회의 진행 중에는 소음을 내거나 소란을 피워서도 안 된다. 이를 어기는 의원에게 의장은 발언철회 지시, 의회 영내 퇴장, 직무정지 표결 등을 명할 수 있다. 실제로 2012년 영국 노동당 폴 플린 전 의원은 본회의에서 “국방부 장관이 의회에 거짓말하고 있다”고 발언했는데, 하원의장의 거듭된 발언철회 지시를 거부하면서 5일간의 직무정지 징계를 받은 바 있다.
전문가들은 ‘고성·손피켓 금지’ 등을 골자로 한 이번 여야 신사협정을 늦었지만 의미 있는 조치라고 평가했다.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라는 마음으로 여야가 이번 합의의 싹을 잘 키워가야 한다는 주문도 내놨다. 다만 내년 총선을 의식한 깜짝 쇼에 그치지 않으려면 근본적인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차재원 부산가톨릭대 특임교수는 24일 통화에서 “진작 했어야 할 일”이라며 “2014년 국회 선진화법이 통과된 후 물리적 충돌은 줄었지만 진영 간의 대립이 심해지다 보니 갈등을 중재하고 조정해야 할 국회가 오히려 앞장서서 그걸 부추기는 폭언 등의 행태가 나타난 것”이라고 말했다.
전예현 정치평론가도 “여야가 토론해야 하는 문제 때문이 아니라 고성이나 피켓 때문에 감정싸움이 일어나고 회의가 파행되는 경우가 많았다”며 “그런 걸 없애는 건 의미가 있는 좋은 시도”라고 평가했다.
다만 국민의힘이 시작한 정쟁 현수막 철거 등에 진정성이 있다기보단 여야가 내년 총선을 겨냥한 ‘보여주기식 쇄신’일 뿐이라는 회의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신율 명지대 교수(정치외교학)는 “예년보다 한두 달 빠를 뿐 총선에서 중도층에게 어필하기 위해 하는 것”이라며 “국감장에서 고성을 안 지른다고 갈등이 사라진다고 할 순 없다.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다”고 비판했다.
일시적인 쇄신책에 그치지 않으려면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차 교수는 “국회 내에서의 언어적인 폭력과 국회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부분에 대해 강력하게 징계할 수 있는 안을 만들어야 한다”며 “또 (의원들의 징계안을 심의하는) 국회 윤리특별위원회의 외부 전문가 의견에 상당한 구속력을 부여하는 게 필요하다”고 했다.
막말이나 자극적인 표현을 통한 정쟁을 정치인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문화를 정착하는 일이 제도 개선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이라는 지적도 많다. 이미 국회법에는 국회의장이나 상임위원장이 회의장의 질서를 어지럽힌 의원을 퇴장시키고, 윤리특위를 거쳐 모욕성 발언을 한 의원을 징계할 수 있도록 규정돼 있다. 하지만 실제로 이 조항이 작동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의원들의 언행에 엄격한 잣대를 대는 정치 문화가 없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지병근 조선대 교수(정치외교학)는 “제도로 해결할 수 있는 부분도 있을 수 있지만, 정치인들 스스로 본인들의 행태가 얼마나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있고 거기에 대한 역사적인 책임을 자신들이 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각이 필요하다”고 했다. 야권 원로인 정대철 헌정회장은 “당장 법과 제도만 고쳐서 되는 게 아니라 (정치인들이) 민주적인 소양과 자질을 길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병관·유지혜·최우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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