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의 이승만 오디세이] “적이 다시 힘 키울 기회를 줄 순 없소” 이승만은 휴전 반대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 협상이 시작된다는 소식을 유엔군 최고사령관 매슈 리지웨이 장군으로부터 들었다. 도쿄에서 급히 날아온 리지웨이가 김포공항의 간이 건물에서 그에게 압록강까지 갈 수는 없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리지웨이의 설명이 끝나자, 이 대통령은 유엔군 최고사령관의 팔을 붙잡았다. “장군, 당신은 매우 설득력 있게 말하는 분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나를 설득시키지는 못하셨습니다.”
그 뒤로 이 대통령은 줄기차게 휴전에 반대했다. 이미 공산군은 밀리고 있으니,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이길 수 있다고 설득했다. 지금 휴전하는 것은 힘이 부친 적군이 다시 힘을 기를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언젠가 중공군이 다시 침입하면, 그때도 미군이 태평양을 건너와서 구원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도 얘기했다. 한국전쟁은 자유주의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 사이의 세계적 대결의 한 부분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그러나 미국은 더 싸울 뜻이 없었고 미국의 휴전 노력을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이 대통령을 성가시게 여겼다. 끈질긴 설득에도 그가 뜻을 굽히지 않자, 미국은 그를 축출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의 반응
초대 대통령의 임기는 1952년 8월 14일까지였다. 당시 대통령은 국회에서 뽑는 간선제였는데, 이 대통령이 다시 뽑힐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그래서 미국은 자신이 선호하는 후보가 뽑히도록 해서, 이 대통령을 쉽게 축출한다는 계획을 추진했다. 미국의 뜻을 충실히 따르는 장면과 군정에서 줄곧 경찰 책임자를 지낸 조병옥이 유력한 후보들이었다.
대통령제에선 직선제가 옳은 방안이었고, 국민들의 절대 다수는 이 대통령의 재선을 지지했다. 그래서 이 대통령은 1951년 광복절 기념사에서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할 것을 제의했다. 이어 그런 개헌의 선행 조치 삼아, 전쟁으로 미루어진 지방자치 선거를 실시했다. 1952년 4월에 실시된 기초의원(시·읍·면) 선거와 5월에 실시된 도의원 선거에선 그가 이끈 ‘자유당’이 압도적 승리를 거두어서, 국민들이 그를 지지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런 움직임에 대응해서, 야당은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상정하고 대통령 선거는 5월 29일에 치르기로 의결했다. 5월 17일엔 정부가 ‘대통령 직선제와 상하 양원제’ 개헌안을 공고했다. 내각책임제와 대통령 직선제가 대결하게 된 것이었다. 이 대결에선 야당이 이길 것으로 예상되었다. 야당은 국회를 장악했을 뿐 아니라 막강한 미국 대사관의 지원을 받았다.
이런 열세에 대응하는 방안으로 이 대통령이 내놓은 것은 국민 동원이었다. 지방자치 선거에서 드러났듯이, 국민들은 이 대통령을 압도적으로 지지했다. 반면에, 국회는 타락한 지도층을 대변한다고 인식되었다.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8월엔 국회의원 50여 명이 배를 사서 대마도로 도망하려다 발각되었다. 해외로 재산과 아들들을 빼돌리는 의원들도 많았다. 많은 피란민이 고생하는데, 국회의원들은 자신들의 세비를 인상했다. 자유당이 동원한 전국의 시민들이 부산의 국회로 몰려들어 의원들을 성토하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했다. 그들은 낮엔 시위하고 밤엔 벽보들을 붙였다.
이처럼 긴장이 높아지던 5월 23일, 무초 주한 미국 대사가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이 대통령을 예방했다. 긴장된 정국을 언급하고서 그는 “정치적 마찰이 생기면, 한국에 불행을 가져올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이 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 도입은 자신의 소신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국회 안의 공산주의자 11명을 적발했으며 그들을 체포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런 혐의의 증거로 50달러 신권들이 가득한 가방 두 개를 보여주면서, 북한에서 홍콩을 거쳐 국내 공산주의자들에게 전해지는 과정에서 압수되었다고 설명했다.
1952년 5월 26일에 부산, 경남, 전남, 전북의 23개 시·군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5월 24일에 부산 인근 금정산에 주둔한 미군 공병대를 공비들이 습격했는데, 계엄령은 이런 상황에 대응하는 조치였다. 계엄군은 곧바로 ‘국제공산당 공작금’ 사건에 연루된 의원들을 체포했다. 다른 의원들은 숨거나 연금되었다.
특이하게도, 계엄사령관은 육군 참모총장 이종찬(1916~1983) 소장인데 부산과 경남의 계엄사령관은 헌병 총사령관 원용덕 소장이었다. 원 소장은 이 대통령의 충실한 추종자였다. 이 참모총장은 계엄에 부정적이었다. 그는 1개 사단을 부산 지역으로 보내라는 신태영 국방장관의 요청을 거부했다. 그리고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는 훈령을 내렸다.
격노한 이 대통령이 이 참모총장을 호출하자, 그는 밴플리트 장군에게 동행을 요청했다. 혼자 경무대에 갔다가 구금되거나 납치될 가능성을 걱정한 것이었다. 이 대통령은 그를 호되게 질책했다. 그러나 밴플리트가 “나는 한국의 정치에는 관여할 수 없지만, 작전권이 나에게 있는 이상 부산에 군대를 투입하는 것은 안 된다”라고 말해서, 이 문제는 풀렸다.
이 일화엔 또 하나의 차원이 있었음이 뒷날 드러났다. 당시 미국 대리대사였던 앨런 라이트너는 1973년의 대담에서 한국군 지휘부의 모반 음모를 밝혔다.
“어느 늦은 밤 내가 살던 대사관저 문 앞에 지프가 닿더니 한국 육군 참모총장이 들어왔어요. 그는 자신이 다른 (참모)총장들도 대변한다고 말했어요. 군부는 지금 전쟁을 하고 있지만, 후방 전선(home front)이 무너지는 것을 가만히 앉아서 바라볼 수만은 없다고 그가 말했어요. (…) 육군 병사들과 해병 몇 명으로 그의 사람들이 대통령, 내무장관, 그리고 계엄사령관을 가택 연금시킬 수 있다고 말했어요. (…) 그들은 지금 감옥에 있는 40 내지 50 명의 국회의원들을 석방하고 그들과 숨어버린 다른 의원들에게 나와서 선거를 치르라고 독려할 것이라고 했죠. (…) 자신이 참모총장인 한국 육군이 유엔군의 지휘를 받으므로, 그는 자신이 움직이기 전에 미국 정부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말했어요.”
이 음모의 주동자들은 아주 동질적이었다. 이종찬 소장(일본 육사 49기), 작전교육국장 이용문 준장(일본 육사 50기) 등은 충실한 일본군 장교 출신이었고 일본군의 습속을 깊이 받아들였다. 일본군의 독특한 습속들 가운데 하나는 하극상(下剋上)이라는 기괴한 행태였다. 군국주의에 열광한 젊은 장교들이 장군들에게 자신들의 뜻을 강요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암살했다. 이런 행태는 흔히 젊은 장교들이 주동한 군부 반란으로 발전했다.
1945년 8월에 히로히토 일왕의 항복 방송을 막고 전쟁을 계속하려고 소좌 1명과 중좌 1명이 일으킨 모반은 대표적이다. 그들은 동참을 거부하는 근위사단장을 살해하고 위조 명령서로 병력을 동원해서 황궁을 점령했다. 그리고 일왕의 측근 대신들과 일왕의 육성 녹음판을 수색했다.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진압군이 이르자, 그들은 자결했다. 이렇게 봉기한 장교들에겐 일왕도 폐위할 수 있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위험을 잘 알았으므로, 히로히토는 항복 방송을 하기 전에 왕위를 이을 수 있는 두 동생으로부터 충성 약속을 받아 놓았었다.
1952년 5월에 모반을 기도한 한국군 고급 장교들은 그처럼 기괴하게 뒤틀린 일본군의 습속에 물든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공정한 선거를 통해서 선출된 정치 지도자가 지니는 권위를 그다지 존중하지 않았고, 기회가 오면, 군부 반란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종찬의 제안은 불법적이었지만, 라이트너는 그것을 선뜻 받아들였다. 그리고 국무부에 그 제안을 보고하고 받아들이라고 건의했다. 이어 그는 유엔 한국위원단과도 이 제안을 논의했고 “하늘이 보낸 기회”라는 반응을 얻었다.
그러나 워싱턴은 라이트너의 경솔한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승만이 휴전을 반대하는 것은 미국으로선 큰 문제였지만, 그를 대신할 인물이 없다는 데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동의했다.
달포가 지난 뒤, 라이트너는 이종찬과 국회의장 신익희에게 미국이 내각책임제 개헌을 추진하는 의원들을 도와줄 마음이 없음을 알렸다. 미국의 지원으로 손쉽게 이승만을 제압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버텼던 야당 의원들은 낙심해서 이 대통령에 대한 저항을 포기했다.
이런 상황을 수습하는 방안으로 이 대통령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에 야당의 내각책임제 개헌안에서 발췌한 몇 개 조항을 넣은 절충안이 국무총리 장택상에 의해 마련되었다. 뒤에 ‘발췌개헌안’이라 불린 이 개헌안은 7월 4일 국회에서 찬성 163표, 반대 0표, 기권 3표로 가결되었다.
마침내 1952년 8월 5일에 정·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승만이 72%가 넘는 523만여 표를 얻었고, 2위인 이시영이 76만여 표를 얻었다. 이 대통령은 기형적인 대통령 간선제를 직선제로 바꾸는 데 성공했고, 선거에서 국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아 정치적 기반을 튼튼하게 만들었다.
자신을 축출하려는 미국의 시도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이 대통령은 국제 사회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유엔 한국위원단의 1953년도 보고서는 “대한민국의 기본적 헌법 구조는 대의적(representative)이고 민주적으로 유지된다”고 평가했다.
대의(大義)와 소절(小節)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이승만은 뚜렷한 직업이 없었다. 젊어서는 막일도 했지만, 주로 연설 사례금으로 생계를 꾸렸다. 박식하고 낭랑한 목소리로 연설을 잘해서, 그는 늘 인기가 높았다.
자연히, 그는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바삐 움직였다. 한번은 워싱턴의 프레스 클럽에서 연설이 있었다. 당시 이승만 부부는 뉴욕에 있어서, 시간이 촉박했다. 이승만은 헤드라이트를 켜고 신호등을 무시하면서 차를 몰았다. 곧 뒤에서 사이렌 소리가 났다. 기동경찰 오토바이 두 대가 쫓아오는 것이었다. 그는 오히려 더 빨리 몰았다.
그렇게 빨리 몬 덕분에, 그들은 경찰차에 따라 잡히지 않았고, 이승만은 시간에 맞춰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열변을 토했고, 청중은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살그머니 돌아보니, 그들을 쫓아온 기동경찰관 두 사람도 입구에 서서 손뼉을 치고 환호하고 있었다.
연설이 끝나고 이승만이 참석자들과 악수를 하는 사이, 경찰관 한 사람이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다가왔다. “20년 동안 기동경찰을 하면서, 내가 따라잡지 못한 교통 법규 위반자는 당신 남편뿐이오. 너무 일찍 천당에 가지 않으려면, 부인이 단단히 조심을 시키시오.” 그러고는 씩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승리의 ‘V’자를 만들어 보이고는 떠났다. 그 뒤로 프란체스카 여사는 남편에게서 운전을 배워서 자신이 차를 몰았다.
이 사소한 일화에서도 이승만의 성품이 드러난다. 그는 자신이 추구해야 할 목표를 늘 명확하게 인식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그 과정에서 만나는 어려움들에 막히지 않았고, 작은 고려 사항들에 얽매이지 않았다. 민족을 이끌고 난세를 헤치면서, 그는 소절(小節)에 얽매여 대의를 그르친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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