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 한지, 렘브란트 작품 보존에도 쓰였다

문경/이승규 기자 2023. 10. 25.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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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주목하는 한지 2代째 만드는 김삼식 韓紙匠 부자

“문경 한지(韓紙)는 원료가 되는 닥나무를 직접 재배하며, 전통 방식을 완벽히 고수해 오직 자연적인 방법으로만 종이를 만듭니다. (루브르박물관이) 동아시아 종이들 중 문경 한지를 선택한 이유이며, 유네스코 문화유산 라벨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습니다.”

김삼식(오른쪽) 한지장과 전수 조교를 맡고 있는 아들 춘호씨가 완성된 문경 한지를 양손으로 펼쳐 보이고 있다. 지난 5일 경북 문경시 농암면 문경한지장전수교육관에서 만난 김 장인 부자는 한지의 재료인 닥나무와 닥풀을 재배하고 있는 모습에서부터 전통 방식으로 한지를 만드는 과정을 설명했다. /신현종 기자

김삼식(77) 한지장(韓紙匠)이 편지 한 통을 꺼내 보였다. 지난 2020년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박물관 연구책임자 아리안 드 라 샤펠이 보낸 서신이었다. 김 장인이 국가무형문화재에 도전할 때 써준 추천장이다. 김 장인은 “70년 세월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지난 18일 오후 경북 문경시 농암면의 문경한지장전수교육관. 김 장인과 그의 아들 춘호(46)씨가 닥나무 껍질을 칼로 긁어내고 있었다. 이물질을 깨끗이 긁어내 백피(白皮·백닥)로 만드는 과정이다. 질 좋은 종이를 만드는 핵심 작업이다. 일부 공방에선 백피를 만들려고 표백제를 쓰기도 하지만 여기선 화학 약품을 일절 쓰지 않는다. 춘호씨는 “전통 공법 그대로다. 한 치라도 어긋나면 종이 질이 확 달라진다”고 했다.

밖으로 나가보니 닥나무밭 3000여 평이 교육관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한쪽에 닥풀밭 200여 평도 보였다. 닥나무 껍질이 주재료라면 닥풀은 섬유를 분산시켜 튼튼하게 해주는 식물성 풀이다. 김 장인은 “스승의 스승의 스승부터 150여 년간 직접 길러온 한지 재료들”이라고 했다. 그는 “조선 닥나무가 아니면 부드러우면서도 튼튼한 품질을 살리기 어렵다”며 “외국 사람들이 이 밭을 보고 놀랐다”고 했다.

지난달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전시됐던 고려 시대 불교 서적 직지심체요절(직지) 복사본. 문경 한지로 만들어진 이 책은 충북 청주 고인쇄박물관 소장품이다. 사진 속 책은 둘 다 문경 한지로 만들었는데, 왼쪽은 원본과 같은 색으로, 오른쪽은 새 한지에 복원했다. /문경한지장전수교육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문경 한지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김 장인은 평생을 옛날 방식대로 종이를 만들었다. 11월이 되면 닥나무를 수확해 증기로 쪄서 말리고, 말린 껍질을 칼로 긁어내 백피(닥섬유)를 만든다. 메밀대나 고춧대를 태워 만든 천연 잿물로 백피를 삶고, 닥풀과 물을 섞은 뒤 직사각형 발을 담가 앞뒤 좌우로 물을 떴다 버리는 ‘외발뜨기’를 한다. 그래야 섬유 조직이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얽혀 질기고 오래간다. 종이 만들기는 매년 11월부터 3월까지만 한다. 기온이 높으면 닥나무 섬유가 썩고, 닥풀도 제 역할을 못 하기 때문이다.

1년에 1만5000장을 만든다. 경전 제작이 필요한 사찰, 예술품 보존 처리 업체 등에 납품한다. 1970년대 탄광이 번성했던 문경에선 광부들 안전을 비는 무속 신앙이 발달해 부적이나 제문(祭文)용으로 한지가 많이 쓰였다. 당시 문경에만 한지 공방 30여 곳이 있었다. 1990년대 탄광이 쇠퇴하면서 공방은 대부분 사라졌고, 김 장인 공방 한 곳만 남았다.

그가 이 일을 시작한 것은 아홉 살 때다. 시집간 누나의 시아주버니였던 유영운 장인의 공방에서 닥나무 삶고, 껍질 벗기는 허드렛일을 했다. 봄부터 가을까진 농사를 짓고, 겨울에는 종이를 만들고, 틈틈이 종이를 팔러 다녔다. 그는 “힘들다는 생각조차 못 하고 그저 일만 했다”며 “진짜 그만두려고 했을 때는 아들이 ‘뒤를 잇겠다’고 해서 다시 이 일에 붙잡혔다”고 했다.

이런 노력을 세계가 주목했다. 지난달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세계유산인 고려의 불교 서적 ‘직지심체요절’ 복사본이 전시됐는데 이 책도 문경 한지로 제작됐다. 앞서 2016년 루브르박물관 관계자들이 공방을 방문한 뒤 2018년부터 문경 한지를 사갔다. 박물관에 있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성 캐서린의 결혼식’ 판화 작품 표구와 렘브란트, 프라고나르의 회화 작품 보존에도 문경 한지가 쓰였다. 9세기쯤 제작된 이슬람 경전 ‘코란’ 보존에도 사용됐다. 루브르박물관 측은 “그동안 예술품 복원·보존용 종이는 일본의 화지(和紙)가 독식해왔는데, 문경 한지의 입지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고 했다.

문경 한지를 포함해 전통 한지는 2026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를 준비 중이다. 김 장인 부자는 한지 학교 설립도 준비 중이다. 김 장인의 후계자인 아들 춘호씨는 “전통 한지 만드는 곳 중 원료까지 직접 재배하는 곳은 우리 집뿐”이라며 “남들이 안 하니까 오히려 이어가야겠다는 오기가 생겼다”고 했다.

신현국 문경시장은 “문경 한지를 세계적으로 만들어준 한지장들에게 감사할 뿐”이라며 “시 차원에서 한지 보존을 위해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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