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붕의 디지털 신대륙] AI 시대, 새로운 ‘프랑크푸르트 선언’이 나올 때다
인요한(64) 연세대 의대 교수가 국민의힘 혁신위원장으로 취임하면서 “와이프와 자식 빼고 다 바꿔야 한다”고 한 말이 화제가 됐다. 그러고 보니 지금부터 30년 전 삼성의 고 이건희 회장이 남긴 명언이다. 올해는 삼성의 신경영 30주년이자 이건희 회장 3주기다. 이를 기념해 한국경영학회는 지난 18일 국제 학술 대회를 열어 신경영이 이룩한 그간의 성과와 미래의 숙제를 조망했다.
이건희 회장의 일갈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꾸라! 그러지 않고는 결코 일류가 될 수 없다’는 메시지로 학회가 시작되었다. 연사로 나선 로저 마틴 토론토대 경영대학원 명예교수는 “누구나 혁신을 이야기할 수는 있지만 그걸 실현하는 건 극히 드문 기적에 가깝다. 특히 개발도상국이던 대한민국의 2류 기업이 그걸 하겠다고 했을 때 누구나 철없는 꿈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고 표현했다. 이 회장은 그 미쳤다는 꿈을 현실로 만든 기업가다. 신경영 30년 동안 삼성전자는 국내 장사만 일삼던 2류 기업에서 세계 최고 반도체, 스마트폰을 만드는 초일류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선진국 상품만 베끼던 개도국 기업이 반도체 메모리 분야에서는 세계 최고를 달성했고 파운드리 분야 3나노 이하 제조 기술에서도 TSMC와 세계 정상을 다투고 있다. 또한 스마트폰, 디스플레이, 2차 전지 등 핵심 분야에서 세계적 경쟁력을 확보했다. 물론 제조 강국으로 발돋움한 중국의 맹추격이 매섭지만, 30년 전을 돌이켜보면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격세지감이다. 기적이라는 표현이 결코 지나치지 않다.
신경영 선언은 전 임원을 프랑크푸르트, 도쿄 등 국제 도시로 불러 세계시장에 도전하라는 ‘세계관의 대전환’에 초점을 맞춰 시작되었다. 선언보다 실천 과정이 더 매서웠다. 그는 철저하게 실적을 챙기고, 실력을 키워 기어코 삼성전자를 세계적 기업으로 만들어냈다. 그러는 사이, 우리가 부러워했던, 첨단 제조 기술로 세계를 호령하던 독일과 일본의 제조 산업은 몰락해버렸다. 일본은 반도체, 전자제품 등 주력 산업에서 모두 2류로 전락했고 독일도 제조업 부진으로 국내총생산 마이너스 성장에 허덕이고 있다. 그러고 보니 지난 10년간 세계를 휩쓴 디지털 대전환은 세계 산업의 지형을 모두 바꿔버렸고 이에 따른 기업들의 부침은 국가의 운명까지 크게 흔들고 있다. 어렵게 만든 신경영의 기적도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위태로운 상황이다. 이참에 신경영 역사가 주는 교훈을 되짚어 보자.
30년 전 시작된 신경영 철학은 놀랍게도 디지털 문명 대전환에도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진다. 고 이건희 회장은 ‘나부터 바꿔야 한다’로 혁신을 시작했다. 누구나 변화는 두렵고 힘든 일이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이 구성원들의 공감이다. 디지털 신문명으로 이동하는 일도 마찬가지, 내 마음부터 공감이 일어나야 한다. 그때 삼성은 국내에 머물렀던 임직원의 세계관을 글로벌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전 직원이 한마음으로 뭉쳐 세계시장에 도전하며 기적 같은 변화를 만들어냈다. 이제 글로벌 톱이 된 삼성의 세계관은 글로벌을 넘어 디지털 신대륙으로 전환해야 한다. 모든 구성원이 일하는 방식과 시장 접근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 일론 머스크가 이끄는 테슬라의 행보는 주목하고 배울 만하다.
철학을 뒷받침하는 힘은 기술이다. 신경영의 핵심은 세계 최고 기술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삼성은 누구도 성공하리라 믿지 않았던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산업에서 세계 최고 기술을 확보했다. 그 기술을 기반으로 스마트폰, 스마트 가전, 최첨단 TV 등 모든 분야에서 일본을 앞지를 수 있었다. 혁신은 기술에서 출발한다. 30년 전 반도체, 디스플레이가 핵심 기술이었다면 지금은 명백하게 AI 시대다. AI를 통한 기술 혁신, AI를 활용한 개인 역량 혁신, AI를 접목한 신산업 창출 등 거의 모든 산업의 발전에 핵심 요소가 되었다. 특히 시가총액 1000조원이 넘는 세계 최정상 기업 중 초거대 생성형 AI에 투자하지 않는 기업이 없을 정도다. 애플은 워치 기반 건강관리 서비스를 준비 중이고, 마이크로소프트와 구글은 초거대 생성형 AI 기술에 매진하고 있고, 결투를 예고하던 일론 머스크와 마크 저커버그도 초거대 생성형 AI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클라우드 시장의 강자 아마존도 연합군을 형성해 고객 중심 AI 서비스를 강화하는 중이다.
삼성 입장에서 AI 기술을 확보하면 반도체, 바이오, 금융, 헬스케어, 로봇 등 적용 가능 분야도 무궁무진하다. 문제는 어떤 비전을 갖고 모든 임직원의 공감을 얻어 강력하게 추진하느냐는 것이다. 30년 전에 그랬듯 혁신을 위해서는 미래 초일류 기업을 위한 새로운 세계관을 공감하고 실천하는 힘이 절실하다. 다시 한번 기적을 위한 도약이 필요한 때다.
신경영의 가장 놀라운 점은 이미 그시절 기업의 역할을 사회적 기여에 집중시켰다는 점이다. 1993년 프랑크푸르트 선언 후 1년뒤인 1994년 삼성서울병원을 설립했고 1996년에는 성균관대학교를 인수하며 교육 사업에도 진출했다. 30년간 통 큰 투자로 비영리법인인 삼성병원과 성균관대학교는 우리 사회에 중요한 공익 기관으로 성장했다. 그는 사후에도 수조 원에 이르는 거액 유산을 희소 암 정복과 교육 사업에 기부했을 뿐 아니라, 값을 매길 수도 없는 엄청난 예술 수집품을 국민 모두의 재산으로 기부하기도 했다. 기업의 이익이 전부이던 시절에 생각도 못 했던 이 무모한 투자와 기부는 디지털 문명 시대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는 ESG 경영과 맥이 닿아 있다. 현대미술의 거장 이우환 작가가 헌정한 추모사 ‘거인이 있었다’는 과장된 표현이 아니었다.
10년 후에는 어떤 산업이 대한민국을 먹여 살릴 수 있을지 앞이 캄캄하다는 30년 전 거인의 걱정은 이 시대 다시 또 우리 모두의 고민이 되었다. 인요한 국민의힘 혁신위원장이 던진 ‘모든 것을 바꿔야 한다’는 일성이 30년 전 기적을 만든 고인의 피 끓는 외침으로 들리는 것은 나만의 환청일까. 나부터 시작해야 한다. 30년 후 대한민국 미래 세대의 행복은 지금 내 마음의 변화, 기성세대 세계관의 변화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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