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숲길] 영화의 산에서 파르티잔이 되어
이른바 ‘영남알프스’ 산정마다 가을이 저마다의 색깔과 무게로 깊어 가고 있습니다. 영남알프스란 경남 밀양, 경북 청도, 울산 울주 등에 해발 1000m 이상 되는 7개의 산이 모여 산군을 이루는 이름을 뜻합니다. 산을 찾아가다 보면 이 가을 가지산 운문산 천황산 신불산 영축산 고헌산 간월산은 제 이름의 높이와 사유의 깊이로 면벽참선하는 수도승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산은 입을 열어 말을 하지 않지만 불어오는 바람을 통해, 키 작은 풀꽃 한 송이의 흔들림으로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저에게는 억새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고통으로 풍화하는 이때쯤이면 그 7개의 산군과 함께, 사람과 사람 사이에 솟아오르는 또 하나의 산을 만나는 ‘열락’이 있습니다. 그 산이 바로 ‘울산 울주세계산악영화제’(UMFF)가 만드는 ‘영화의 산’입니다. 부산엔 부산국제영화제(BIFF)란 ‘영화의 바다’가 펼쳐져 있다면, 영남알프스엔 ‘영화의 산’이 솟아있습니다. 저는 지금 그 산에 올라 ‘비박’하는 산꾼인 듯, 미답봉에 도전하는 산악인인 듯 영화의 산이 던져주는 ‘산’ ‘자연’ ‘사람’이라는 화두를 붙잡고 있습니다. 울산시 울주군 영남알프스 복합 웰컴센터에 ‘베이스캠프’를 만들어 놓은 UMFF는 국내 유일의 국제 산악영화 축제입니다. 올해로 8회가 되는 그 산은 ‘함께 오르자, 영화의 산’(Come up higher, Cine-mountain)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지난여름 지독한 더위의 고통에 지친 사람들을 산정으로 불러 모으고 있습니다. 그 산정에는 새로운 휴식이 있다고 위로하면서 말입니다.
영화의 산은, 산을 높이로 즐기는 사람들에겐 히말라야 설산 그 이상의 높이를 펼쳐줍니다. 눈사태와 빙하의 크레바스가 끝없이 펼쳐지는 가운데 누구든 주인공이 되어 자신의 산을 오르게 합니다. 산을 도전의 대상으로 오르는 사람들에겐 한순간만 방심해도 천 길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손에 땀을 나게 하는 긴장과 몰입의 산을 선물합니다. 영화란 간접경험을 통한 체험이지만 영화가 끝난 뒤 몰려오는 감동이 있습니다. 그건 대부분 산악영화 앵글이 목숨을 건 다큐멘터리이기 때문입니다. 그 선물의 배경에는 단 한 번 경험하지 못한 대자연이 우리를 반기고, 살아가는 일에 지친 우리를 다시 도전하게 하는 힘을 줍니다. 또한 지친 영혼을 위로하는 자유로운 바람의 노래가 있습니다.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사람의 야성이 있고, 산을 관조하는 산 나그네의 유유자적이 있습니다. 저는 동서양의 산과 등반에 관해 이야기할 때마다 ‘서양의 산과 동양의 산이 만나 하나가 되는 산이 있다’고 전제한 뒤 그 산이 ‘UMFF라는 산’이라고 말합니다.
산이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듯, 영화의 산에는 남녀노소의 구분이 없습니다. 저는 올해 영화의 산에서 지난 2021년 세계 최고의 산악인에게 주는 황금피켈상 평생공로상을 받은 일본 산악인 야마노이 야스기(山野井泰史) 부부를 직접 만났습니다. 그는 아시아인으론 최초로 그 상을 받은 산악인입니다. 그는 세계의 모든 거대절벽을 혼자서 등반한 ‘단독산행’을 추구하는 산악인입니다.
올해 58살, 165cm의 키에 58kg의 몸무게를 가진, 작은 체구의 그의 옆에는, 그보다 7살이 많은 부인 야마노이 타에코가 있었습니다. 그의 등반은 어떤 후원도 받지 않고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는 ‘단독산행’의 철칙이 있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산을 오르는 그의 도전이 시사하는 바가 컸습니다. 작금의 우리 산악계가 보여주는 요란한 원정이 배워야 하는 정답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들 부부는 산에서 모두 20개 이상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잃었습니다. 그런 고통과 고난 속에서도 부부는 평온한 미소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들 부부에게 목숨을 건 사투에서 겪었던 극심한 공포를 극복하는 방법은 ‘그냥 잊어버리고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산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과 자연이 스승이 되는 시간입니다. 그 가운데 산악영화제가 있다는 것이 축복처럼 느껴지는 시간입니다. 저는 오는 29일 폐막작 상영이 끝나는 시간까지 영화의 파르티잔이 되어 그곳에 머물고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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