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눈] 옛 국제연맹 최후 떠올리게 하는 유엔

김태훈 2023. 10. 24.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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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주체 돼야 할 상임이사국
분쟁 당사국 되면 막을 수 없어
국제사회 약육강식 퇴행 맞아
한·미 동맹 중요성 더욱 더 커져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에 거부권을 부여하는 방안은 1945년 2월 얄타 회의에서 결정됐다.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현 러시아) 공산당 서기장이 강력히 요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제2차 세계대전 회고록’에서 이렇게 밝혔다.

“스탈린은 ‘주요 강대국 사이의 분쟁을 방지하기 위해서 어떤 체제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단언했다. … 우리는 마침내 4대국의 의견 일치가 없는 한 안보리는 실제로 아무 결정을 하지 못하게 했다. 어떤 주요 쟁점에 관해 미국, 소련, 영국 또는 중국 중 한 국가라도 찬성하지 않으면 안보리의 결정을 중단시킬 수 있도록 했다.”
김태훈 외교안보부장
‘4대국’이라고 한 것은 당시 프랑스는 상임이사국 합류가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련에 양보한 것처럼 묘사했으나 영국이라고 거부권을 원치 않았을까. 안보리가 인도나 홍콩의 식민통치를 그만두라고 영국에 요구한다면? 강대국으로서 영국도 내심 거부권을 탐냈을 수 있다. 처칠은 회고록에 “(거부권 도입의) 결과는 후세가 판단할 것”이라고 적었다.

흔히 2차대전 이전 국제연맹의 실패를 교훈 삼아 만든 기구가 유엔이라고 한다. 국제연맹도 유엔처럼 상임이사국을 둬 평화 유지 책무를 맡겼다. 1920년 창설 당시 상임이사국은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인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4개국이었다. 미국은 의회가 국제연맹 가입 비준안을 부결하며 상임이사국은커녕 일반 회원국도 되지 못했다. 훗날 독일과 소련이 상임이사국에 추가됐다.

그런데 ‘국제 경찰’ 노릇을 해야 할 상임이사국이 되레 총을 든 강도로 돌변했다. 일본은 중국,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침략한 뒤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독일은 1차대전 이후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이 자국에 부과한 제재를 수용할 수 없다며 결별을 선언했다. 소련은 핀란드를 침공했다는 이유로 제명됐다. 2차대전이 터질 무렵 국제연맹을 지탱하는 강대국은 영국과 프랑스만 남았다.

1945년 10월24일 출범한 유엔은 스탈린의 말대로 강대국 간 충돌을 막는 데 어느 정도 기여했다. 이는 안보리 5대 상임이사국 모두가 핵무기 보유국이 되면서 서로 간의 전쟁이 어려워진 영향이 크다. 반면 강대국과 그렇지 않은 나라 간의 분쟁은 꾸준히 있어 왔고 지금도 그렇다. 소련을 승계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이 가장 대표적이다.

유엔에서 유일하게 구속력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곳이 안보리다. 그러나 2022년 2월 러시아·우크라이나 간에 전면전이 발발한 뒤 현재까지 안보리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미국, 영국 등이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의 군사행동을 즉각 중단시켜야 한다”는 내용의 안보리 결의를 추진했지만 러시아의 거부권 행사에 가로막혀 불발했다. 개전 후 2개월이 지나 우크라이나를 찾은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안보리는 이번 전쟁을 예방하거나 종식시키는 데 완전히 실패했다”고 자인했다. ‘안보리를 어떻게 할 것이냐’는 기자들의 물음에 구테흐스 총장은 “나는 안보리를 개혁할 힘이 없다”고 했다. 상임이사국의 거부권은 총장도 어쩌지 못하는 ‘성역’에 해당함을 실토한 셈이다.

지금의 유엔은 국제연맹의 최후를 떠올리게 한다. 상임이사국으로서 책무가 부여된 강대국이 평화 유지의 주체가 아닌 분쟁 당사국으로 돌아서는 순간 이를 막을 방법이 없다. 전쟁 발발 후 유엔을 대신해 주요 7개국(G7)이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유럽연합(EU) 등의 존재감이 훨씬 더 커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유엔 같은 보편적 국제기구보다 특정 가치나 이념 또는 지역적 유대를 토대로 한 국가들끼리의 결속이 한결 더 중요해진 것이다.

“우리는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정복하는 것을 특권처럼 여기던 시대로의 퇴행을 원하지 않습니다.” 지난 9월20일 사울리 니니스퇴 핀란드 대통령의 유엔총회 연설 일부다. 허나 우리의 바람과 달리 국제사회는 이미 약육강식으로의 역주행이 시작됐다. 한·미동맹 강화와 한·미·일 군사협력 심화에 힘써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태훈 외교안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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