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환경 사업 하려고 ‘심해저 광물자원’ 손댄다?
공해상에 분포한 심해저 광물을 둘러싸고 국가 단위의 ‘눈치게임’이 시작됐다. 망간이나 코발트, 구리 등 심해저에 매장된 광물자원이 미래 먹거리인 전기차 배터리나 풍력발전 등에 쓰이기 시작하면서 상업적 광물 채굴 규정을 만들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채굴 규정이 만들어지면 각국은 정해진 틀 내에서 심해저 광물을 자원화할 수 있다.
다만 각국은 자신들이 앞장서 심해저 광물을 개발하겠다는 목소리는 내지 못하고 있다. 광물 채굴이 심해저 해양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누구도 알 수 없는 상황이라 개발 명분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2차산업 육성 등이 걸려 있는 한국 정부는 구체적인 국제 채굴 규정을 만들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2021년 태평양 나우루 제정 요청
ISA, 2년 시한 내 규정 마련 못해
당장 회원국들 채굴 신청 가능해져
■ 심해저 채굴 ‘출사표’ 던진 작은 섬
23일 국제해저기구(ISA)에 따르면 ISA 회원국은 지난 7월 열린 총회에서 2024년까지 심해저 광물 채굴을 위한 법적 프레임워크(구조)를 만들기로 합의했다. ISA는 유엔 산하 해양규제기관으로, 공해상 해저 자원을 인류 공동유산으로 관리해 일부 선진국이 독점하지 못하도록 하자는 취지로 1994년 설립됐다. 한국 포함 36개국이 이사국이며 회원국은 유럽연합을 포함해 168개국에 달한다. 주요 선진국 중에는 미국만 빠져 있다.
심해저 채굴에 관한 논의는 1960년대부터 있었지만 현재까지 구체적인 법 규정은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현재 각 국가는 공해상 심해저 자원을 탐사만 할 수 있을 뿐 상업적 목적으로 채굴할 수 없다.
채굴 규정을 만들자는 논의는 2021년부터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태평양의 섬나라 나우루가 캐나다의 광물 기업 더메탈스컴퍼니(TMC)와 함께 자국 인근 해역 자원을 개발키로 하면서, 2021년 7월 ISA 이사회에 관련 규정을 만들어줄 것을 요청했다.
국제해양법상 ISA 이사회는 심해저 자원 채굴에 대한 규율과 절차를 만들어달라는 요청을 받으면 2년 내에 이를 마련해야 한다. 그러지 못할 경우 이사회는 기존 규범에 따라 심해저 채굴 계획을 고려하고 잠정 승인해야 한다.
그러나 ISA는 2년 기한이 만료되는 올해 7월에도 논의 끝에 합의된 채굴 규정을 내놓지 못했고 공을 내년으로 넘겼다. 국제해양법이 규정하는 기한이 지났기 때문에 나우루를 포함한 회원국들은 ISA에 심해저 자원 채굴을 신청할 수 있으며, 회원국 3분의 1 이상이 찬성하면 법적으로 채굴에 나설 수 있게 된다.
선진국들 ‘생태계 우려’ 중단 입장
삼성·구글 등 글로벌 대기업 동참
정부 “4차 산업에 필요” 개발 무게
■ 심해저 개발, 득일까 독일까
나우루가 실제 올해부터 심해저 채굴에 착수할 가능성은 낮다. ISA 회원국 사이에서 채굴 반대 기류가 감지되기 시작하면서 ‘분위기상’ 선뜻 광물 채굴에 나서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특히 회원국들은 7월 총회에서 규정이 제정될 때까지 상업 채굴을 하지 않기로 잠정 합의했다.
프랑스와 독일, 스페인, 뉴질랜드 등 주요 선진국들은 이미 개발 규정 제정을 포함해 심해저 광물 채굴 논의를 중단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 칠레나 에콰도르, 코스타리카, 피지 등도 이에 동참하고 있다. 이들은 무분별한 심해저 광물 채굴이 해양 생태계를 파괴하고 생물다양성을 해칠 우려가 크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들은 심해저 광물 채굴이 해양 생태계에 미칠 영향이 아직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점을 들어 섣부른 개발론에 반대 목소리를 내고 있다. 채굴 규율조차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각 국가나 기업의 자원 채굴 행위가 어떤 후과를 불러올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비정부기구(NGO) 역시 이런 우려의 목소리에 힘을 보태고 있다. 국내 환경단체인 시민환경연구소는 입장문에서 “과학적 불확실성 속에서 충분한 지식과 근거가 모일 때까지 (채굴을) 잠정적으로 중단하는 것이 유일한 대안”이라며 “현재의 규율 공백으로 인해 심해저 채굴에 대한 환경영향평가 및 보호 조치는 효과적으로 이행되지 못할 것”이라고 밝혔다.
주요 글로벌 대기업은 이 같은 주장을 지지하고 있다. 삼성SDI와 구글, BMW, 폭스바겐, 볼보, 르노 등 기업은 심해저 광물 채굴의 안전성이 입증되기 전까지 자원 이용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 한국 정부 개발에 무게…“환경도 고려”
심해저 개발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보는 입장도 설득력이 있다. 현재까지 심해저에 매장된 것으로 파악되는 자원은 망간과 코발트, 니켈, 구리 등인데, 이는 모두 전기차 등에 들어가는 2차전지(배터리)의 필수 소재다. 탄소중립 및 에너지전환 과정에 향후 이들 자원의 수요가 급증할 것을 고려하면 결국엔 해당 자원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각국이 내놓은 탄소중립 시나리오가 제대로 실현된다면 2050년 기준 망간과 니켈, 코발트, 구리의 수요량은 2022년에 비해 각 12.4배, 6.7배, 4.3배, 2.6배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고영탁 한국해양과학기술원 대양자원연구부장은 “전기차 배터리 등 4차산업 외에 다양한 재생에너지 산업에도 심해저 광물이 투입된다”며 “특히 북유럽 지역에서 활발한 풍력발전에 가장 필요한 광물이 구리”라고 말했다.
한국 정부는 심해저 자원 채굴 규정 제정을 지지하고 있다. 해양수산부 관계자는 “심해저 광물자원은 꼭 필요한 미래 자원인 데다 다른 국가에 비해 탐사 광구를 선점한 측면도 있다”며 “현재까지 정부는 해양 환경에 미칠 수 있는 영향도 잘 고려해 개발 규칙을 만들자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NGO는 선진국 반열에 오른 한국이 책임 있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개발 이익보다는 환경 보호 쪽에 보다 적극적인 목소리를 낼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을 비롯한 36개 이사국은 오는 30일부터 개최되는 ISA 이사회에서 심해저 채굴 규정 제정에 대한 논의를 이어갈 예정이다.
시민환경연구소는 입장문에서 “심해저 환경의 취약성을 고려할 때 광물 채굴은 해양 환경, 생물다양성 등 광범위한 영향 차원에서 면밀한 조사와 규범 설정 후에 재고돼야 한다”며 “일시 중단(모라토리엄)을 지지하는 것이 현재의 과학적 근거와 국제적 경향을 바탕으로 볼 때 합리적”이라고 밝혔다.
이창준 기자 jcha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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