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학도에서 번역가로 … “인생 망쳐도 내 손으로 망쳐야” [마이 라이프]

김용출 2023. 10. 24.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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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에세이집 낸 한국문학 번역가 안톤 허
국내·외 오갔던 학창시절
코트라서 일한 아버지 따라 해외생활
9년간 5개국 … 태국서 고등학교 마쳐
번갈아 가며 적응 ‘참혹한 과정’ 겪어
부모님 영향에 법대 진학
무려 일곱 살 때부터 작가 꿈꿨지만
부모는 문학의 ‘문’자만 꺼내도 외면
“그들은 자기 인생밖에 모른다” 적어
한 해 두 작품 부커상 후보
신경숙 ‘리진’ 옮기며 문학번역 활동
지난해 ‘저주토끼’·‘대도시의 사랑법’
동시 후보에 지명된 번역가로 명성
“답은 항상 원문에 있지요”
가장 중심적·근본적 정체성은 ‘독자’
번역 일도 결국 독서의 일부에 불과
2024 여름엔 영문소설 출간도 앞둬

서울 홍대 앞 주차장 거리에서 열린 ‘서울 와우북 페스티벌’ 행사장을 찾은 그는, 우연히 부스에서 소설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정보라 작가의 소설집 ‘저주토끼’였다. 소설집에 실린 단편 ‘머리’를 읽었다. 곧장 소설 속으로 빨려들었다.

“작품을 읽는데, 일단 문장이 너무 마음에 들었습니다. 아이러니가 풍부한데 유머가 살짝 담겨 있었죠. 무서운 이야기인데 웃기기도 하고, 웃긴 이야기인데 무섭기도 하고. 스토리 내용도 너무 마음에 들었고요.”
2022년 부커상 후보에 오른 정보라의 ‘저주토끼’와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을 번역한 번역가 안톤 허가 자신의 삶과 번역 이야기를 펼쳐 놓은 에세이집을 펴냈다. 그는 “번역할 때 의문이 생기거나 힘들면 항상 원문으로 돌아가서 문제가 되는 부분을 자세히 살핀다. 답은 항상 원문에 있다”고 말한다. 허정호 선임기자
2018년 10월 번역가 안톤 허는 정보라의 ‘저주토끼’를 번역하기로 마음먹었다. 현장에서 정 작가와 출판사 대표를 만나서 허락을 받은 뒤, 영미권 출판사를 찾아서 출판 계약을 맺었다. 2021년 책을 번역 출간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걸려서 격리한 지 거의 일주일이 지난 2022년 초봄 어느 저녁. 그는 혼자 쓸쓸히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도서출판 ‘혼퍼드 스타’의 편집자 테일러 브래들리에게 온 이메일이 눈에 들어왔다.

“‘저주토끼’ 관련 아주 좋은 소식!!!”

책이 나온 지 일 년도 안 된 이 시점에서 무슨 좋은 소식이? …설마? 그는 이메일을 클릭했다. 정보라의 작품이 부커상 국제부문 후보작으로 올랐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기뻐서 비명을 질렀지만 힘이 없어 신음 소리가 나왔다. 배우자와 영상통화를 하면서 눈물을 터뜨렸다. “갑작스러워서 아주, 아주 멋진 교통사고를 당하는 느낌이었다”고, 그는 나중에 책에 적었다.

잠시 뒤 휴대폰에서 다시 이메일 알림음이 들려왔다. 뭐지? 도서출판 ‘틸티드 액시스’의 크리스틴 알파로의 이메일이었다. 설마? “상영씨, 안톤씨, 축하드립니다. ‘대도시의 사랑법’이 부커상 롱리스트에 올랐습니다.”
오 마이 갓! 정보라의 ‘저주토끼’와 함께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이 동시에 부커상 후보로 올랐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순간이었다. 특히 정보라의 작품은 최종 후보까지 오르며 큰 화제가 됐다. 그는 부커상 역사상 한 해에 두 권의 책을 동시에 후보로 올린 세 번째 번역가가 됐다.

2022년 부커상 후보에 오른 정보라의 ‘저주토끼’와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 두 작품을 모두 번역한 한국문학 번역가 안톤 허가 첫 에세이 ‘하지 말라고는 안 했잖아요?’(어크로스)를 펴냈다.

책에는 법대 출신이던 그가 늦은 나이에 문학 공부를 시작해 한국문학 번역가로 데뷔하고 부커상 후보 동시 지명을 달성하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삶과 일, 그의 생각이 담겨 있다. 부커상 뒷얘기, 정 작가와의 우정, 영미 출판계를 뒤흔든 사기 사건은 물론 그가 옥스퍼드대와 프린스턴대 등에서 행한 강연록도 담겼다.
아울러 문학 번역의 지난함과 어려운 환경 등도 적나라하게 담겨 있다. 그럼에도 근원에는 한국문학과 작가, 번역에 대한 깊은 애정과 자긍심이 담겼다. 책 속으로 들어가면, 능동적이고, 야성적이며, 전복적인 안톤 허가 다가오는 게 보일지도.

“부모님 말은 절대 들어서도, 믿어서도 안 된다. 그들은 자기 인생밖에 모르는 사람들이다. 실수를 해도 자신들의 실수를 하는 것이 낫다. 인생을 망쳐도 내 손으로 망쳐야 한다.” “문학번역에 손을 대기 전 돈 잘 버는 통역사이자 번역가였던 나는 갑질을 하거나 무례하게 구는 의뢰인은 미련 없이 내 인생에서 도려내고 다음 의뢰인을 받았다.”

안톤 허는 어떻게 번역의 세계, 특히 한국문학 번역의 세계에 들어오게 된 것일까. 그의 작가적 여로는 어디로 향해 나아갈까. 안톤 허 작가를 지난달 21일 서울 용산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인터뷰는 편의상 라이프 스토리를 따라 진행됐다.

그는 1981년 스톡홀름에서 코트라에 다니던 아버지와 가정주부 어머니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안톤이라는 이름은 고등학교 때부터 사랑했던 소설가 앤토니아 수전 바이엇의 이름에서 따왔다. 일곱 살 때부터 작가와 소설가 등 문학으로 먹고사는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한 번도 변화한 적 없이 꾸준히. 마치 북극성 같이.
―무려 일곱 살 때 작가가 되겠다고 꿈을 갖게 됐다고 했는데, 무슨 계기가 있었나요.

“아니요. 대통령이 되고 싶다, 연예인이 되고 싶다, 소설가가 되고 싶다, 이런 것은 오히려 그 나이대에 너무 흔한 꿈 아닌가요? 사람들은 성장하면서 꿈이 변하는데, 전 안 변한 거죠. 일곱 살 때의 꿈을 이뤘다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거죠.”

코트라에서 일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적 9년간 국내와 해외에서 생활해야 했다. 스웨덴과 홍콩, 에티오피아, 미국, 태국 등 5개국에서 생활했다. 최종적으로 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한국에서 대학을 다녔다.

―학창 시절 국내 및 해외를 왔다 갔다 하면서 보내셨는데, 어땠습니까.

“해외와 한국을 번갈아 가면서 적응하는 과정은 참혹했습니다. 한국에 돌아올 때마다 모든 것을 다시 배우고 따라잡아야 했고, 해외에 나가면 다시 언어가 완전히 뒤집어졌으며, 원하는 모범생 상도 너무 달랐거든요. 2∼3년마다 갈아엎어야 하는 과정이 굉장히 힘들었고, 지금도 엄청난 트라우마입니다. 특히 중학교 시기는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최악의 시기인데, 저는 미국과 한국에서 무려 4년이나 보냈어요. 제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의문일 정도로 지금도 트라우마죠.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중학교 악몽을 꿔요.”

문학을 꿈꿨지만, 그는 부모의 영향으로 고려대 법대를 진학해야 했다. 부모는 문학으로 먹고사는 삶을 상상하지 못했다고, 그는 회고했다. “문학의 문자만 꺼내도 말을 끊으셨다. 문학을 전공하고 싶다고 말하는 도중에 아예 식당에서 나가 버린 적도 있다”고. 대학을 졸업한 뒤에야 비로소 번역가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다.

“한국에 사는 안톤 허라고 하는데, 신경숙 작가의 작품을 영어로 번역하고 싶습니다. 오디션을 한번 보고 싶군요.”

한국문학 번역을 위해 영문과 대학원까지 진학했던 그는 어느 날 신경숙 작가의 에이전트 바버라 지트워(Barbara Zitwer)에게 이같이 제안했다. 신경숙은 그가 오랫동안 좋아하고 존경했던 작가였다. 바버라는 지금 출간을 생각 중인 작가의 책이 두 권 있는데 먼저 샘플 번역을 해서 보내 달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그에게 보낸 책은 신경숙의 ‘겨울우화’와 초기 작품 두 권이었다.

하지만 그가 번역해 보고 싶은 신경숙의 작품은 장편 ‘리진’이었다. 왜냐하면 ‘리진’의 중심 인물은 궁에서 춤추는 여성으로, 그에겐 번역가로 읽혔기 때문이다. 제안받은 소설 2권에 ‘리진’까지 신 작가 작품 세 권의 샘플 번역을 보냈다.

바버라는 ‘리진’이 너무 재미있다며 ‘리진’의 번역 출간을 추진해 보자고 제안했다. ‘리진’이 미국의 유명 출판사에 팔렸고, 안톤 허는 번역가로 정식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한 차례 계약 조건이 변경돼 고생했지만, 그는 2018년 장편 ‘리진’을 번역 출간함으로써 한국문학 번역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 이후 신경숙의 ‘바이올렛’, 정보라의 ‘저주토끼’,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 강경애의 ‘지하촌’, 황석영의 ‘수인’, 백세희의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BTS의 ‘비욘드 더 스토리’ 등 많은 작가의 작품을 번역했다.
―한국문학을 번역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이나 방법은 무엇입니까.

“번역가마다 창의적인 의역을 하는 등 스타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원문에 대한 이해가 남다르다고 자부해요. 일단 코리안 네이티브 스피커이고 국문학 전통에서 온 사람이기 때문이죠. 저는 번역을 하다가 막히면 항상 원문으로 돌아갑니다. 원문에선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나, 이게 무슨 뜻인가. 원문을 충실하게 따라가려고 하죠. (답은 항상 원문에 있다!) 네, 답은 항상 원문에 있지요.”

―하루 루틴은 어떻게 되나요? 오후 네 시면 키보드에서 손을 뗀다고 하셨는데요.

“아침에 일어나서 이메일이나 트위터를 확인하고 이메일에 답장을 합니다. 제 직업은 이메일을 쓰는 사람이죠. 번역은 그 옆에 붙어 있는 것이고요. (웃음) 오후에 작업실에 가서 점심을 먹고 2∼3시간 정도 번역을 합니다. 오후 4시에는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요.”

그는 “번역을 하는 일 자체는 오히려 쉽다고 할 수 있다”면서 “요약하면 번역 계약을 성사시키는 작업에는 번역을 하는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적었다.

책을 읽고 인터뷰를 하는 내내, 번역가 안톤 허는 하지 말라고 하지 않는 이상 과감히 도전하는 삶을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제목처럼. 아니, 어쩌면 하지 말라고 한 것조차도 단호히 거부하면서 자신의 마음이 이끄는 삶을 살아온지도 모르겠다. “인생을 망쳐도 내 손으로 망쳐야 한다”는 신조로. 프리랜서 번역가로, 한국문학 번역가로.

독보적인 한국문학 번역가로 성장한 그는, 이제 국제적인 소설가로 데뷔도 앞두고 있다. 미국 유수의 출판사인 하퍼콜린스의 임프린트 ‘하퍼비아’와 계약, 내년 여름 영문소설을 출간할 예정이다. 한국 출판사에서도 한국어 소설을 펴내기로 했다. 그의 미래는 도대체 어떤 모습일까.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의 미래를 상상해 나갈 즈음, 언뜻 2022년 11월4일 프린스턴대에서 그가 했던 강연이 떠올랐다.

“창작은 제 번역의 일부일 뿐이고, 번역 일도 결국 제 독서 행위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저의 가장 중심적이고 근본적인 정체성은 독자로서의 정체성이고, 그 이외의 것들은 모두 거기서 비롯됩니다. 제가 이런 번역가인 것, 이런 작가인 이유는 바로 독자로서의 자부심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번역가 안톤 허는… ●1981년 스톡홀름에서 출생 ●고려대에서 법학과 심리학을, 방송통신대에서 프랑스어를 공부, 서울대에서 영문학 석사 취득 ●2018년 신경숙의 ‘리진’ 번역하면서 한국문학 번역 활동 ●황석영의 ‘수인’, 신경숙의 ‘리진’ 및 ‘바이올렛’, 정보라의 ‘저주토끼’,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 강경애의 ‘지하촌’, 백세희의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BTS의 ‘비욘드 더 스토리’ 등 번역 ●번역한 정보라의 ‘저주토끼’와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이 2022년 부커상 후보에 동시 노미네이트 ●홍진기 창조인상 등 수상 ●에세이 ‘하지 말라고는 안 했잖아요?’ 출간, 내년 영문소설 출간 예정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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