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한 카루나틸라카 “내전의 진실 찾아… 말할 수 없던 사람들 목소리 담으려 했죠”
전쟁 사진작가 모델로 작품 집필 시작
피살된 이와 유령들이 펼치는 이야기
자신을 죽인 범인 추적하는 탐정소설
스리랑카 내전 바탕 기묘한 서사 담아
심사위원 만장일치 작년 부커상 수상
‘교활하고 분노에 찬 코믹’ 호평 받아
“죽음 이후 모습 여러 출처서 차용한 뒤
남아시아 사고 구조에 맞게 만들어내”
2009년 5월, 스리랑카 정부군이 타밀족 반군인 ‘타밀 엘람 해방 호랑이(Liberation Tigers of Tamil Eelam)’ 지도자를 사살하고 반군 지역을 장악하면서 26년간 지속해 온 내전이 종식됐다. 내전은 싱할라족에게 차별받던 타밀족 가운데 급진파들이 반군을 조직한 뒤 1983년 7월 정부군 병사 13명을 살해하면서 시작됐다.
비록 스리랑카 사람들의 굴레가 됐던 내전은 끝이 났지만, 내전 막바지에 사망한 민간인 규모와 사건의 진실을 둘러싸고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누가 언제 어디에서 얼마나 죽었고, 죽음의 진실은 무엇인가. 이때 산 사람이 아무것도 모른다면 죽은 사람들이 말하게 놔두면 어떨까, 하고 소설가 세한 카루나틸라카는 생각했다.
“저는 살해된 활동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소이사에게서 주된 영감을 얻었습니다. 물론 (소설 속) 말리가 지금의 캐릭터가 되기까지 몇 가지 버전을 거치긴 했지만요.”
1989년 스리랑카의 수도 콜롬보를 배경으로 살해된 사진작가 말리 알메이다와 유령들이 펼치는 기묘한 이야기를 담은 2022년 부커상 수상작 세한 카루나틸라카의 ‘말리의 일곱 개의 달’(유소영 옮김, 인플루엔셜)이 번역 출간됐다.
“영혼들은 떼로 몰려와서 서로 밀고 밀리며 흰옷 입은 여자에게 성난 목소리로 항의하고 끊임없이 묻는다. 너는 창백한 얼굴들을 퀭한 눈과 깨진 머리, 분노와 고통과 혼란으로 일그러진 눈들을 바라본다.”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사진작가 말리 알메이다는 죽은 자들의 대기실에서 유령으로 깨어나 실종된 자신을 찾아 헤맨다. 일곱 개의 달이 뜨고 지기 전까지 망각의 빛으로 들어가면, 다음 생을 살 수 있다는 안내원의 말을 듣는다.
지나치게 사무적인 사후 세계의 모습에 실망한 말리는 실종된 자신을 찾아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친구들을 보고 공포에 사로잡힌다. 조국은 정부군과 타밀 반군 사이에서 격렬한 내전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재, 암살, 색출, 납치, 고문, 감금, 실종, 테러, 폭파….
스리랑카 북부에서 세상을 뒤흔들 사진을 찍었음을 기억한 말리는 마침내 자신이 죽은 이유를 어렴풋하게 깨닫는 한편 자신을 찾는 친구들 역시 위험에 놓였음을 알게 된다. 말리는 이제 자신의 영혼을 건 마지막 도박을 시도하는데.
“우리는 모두 자신의 삶을 바칠 쓸데없는 명분을 찾아내야 한다. 그것조차 없다면 왜 굳이 숨을 쉬는가? 돌아보면, 일단 자기 자신의 얼굴을 보고 눈의 색깔을 알아보고 공기를 맛보고 흙의 냄새를 맡고 가장 청정한 지하수와 가장 더러운 우물물을 마셔본 다음에, 우리가 삶에 대해 할 수 있는 가장 친절한 말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삶은 결코 아무것도 아니지 않다.”
자신을 죽인 범인을 추적하는 탐정소설 형식을 띤 작품은 25년 넘게 이어진 내전과 독재로 얼룩진 스리랑카를 보여주는 역사소설이자, 허락되지 않았던 사랑을 고백하고 속죄하는 연애소설이며, 죽은 자의 세계가 펼쳐지는 판타지 소설이다.
스리랑카 작가 카루나틸라카는 왜 소설 ‘말리의 일곱 개의 달’을 써야 했고, 소설이 보여주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그의 작가적 여로는 어디에서 시작해 어디로 가는 것일까. 카루나틸라카와 출판사의 도움을 받아서 이메일로 만났다.
―말리 알메이다가 죽음 이후 자신이 살해된 이유와 범인, 필름을 찾아 나서는 스토리는 어떻게 해서 나온 것인지요.
“저는 탐정소설과 살인 미스터리를 읽으며 자랐고, 호러 소설과 유령 이야기도 무척 좋아했습니다. 말리는 카메라를 든 용병으로 내전의 여러 진영을 위해 일했어요. 저는 이 살인 미스터리 속 누가 말리를 죽였는지 찾아내는 질문을 통해서 스리랑카 내전의 여러 다양한 세력들을 찾아볼 수 있었지요.”
―죽음 이후의 모습은 어떻게 상상했는지 궁금합니다.
“여러 출처에서 차용했습니다. 종교적인 텍스트, 불교와 힌두교 신화, 유령 이야기, 닐 게이먼의 ‘샌드맨(Sandman)’ 시리즈, 클라이브 바커의 단편집 ‘피의 책(Books of Blood)’, 단테의 ‘신곡: 지옥’까지. 하지만 결국 남아시아 사고 구조에 맞게 저만의 버전으로 사후 세계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주인공 말리 알메이다 외에도 매력적인 캐릭터가 많이 나오는데, 가장 애정이 가는 인물은 누구입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저에겐 표범 유령이 소설 속 영웅입니다. 비록 재키와 조니, 크로우맨과 어울리는 것을 즐기긴 했지만 표범 유령이야말로 그 모든 캐릭터 중 가장 현명하기 때문입니다.”
1975년 스리랑카 남부 항구도시 골에서 중산층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수도 콜롬보에서 자란 세한 카루나틸라카는 2010년 크리켓을 소재로 스리랑카 내전을 풍자한 소설 ‘차아나맨’으로 데뷔했다. 이때 그의 나이 35세. 10년 후 ‘죽은 자들과의 잡담’을 인도에서 출간했고, 영국에서 ‘말리의 일곱 개의 달’로 재출간해 커먼웰스 문학상, 그라티앤문학상, 부커상 등 많은 상을 받았다.
―소설 쓰기에서 자신만의 원칙이나 방법이 있는지요.
“저는 ‘노력하는 것, 그리고 재미있어야 한다는 것(try and be interesting)’ 외에는 원칙과 규칙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많은 조사를 하지만, 대부분 본능과 직감에 따라 글을 씁니다. 그런 다음 몇 달, 혹은 몇 년 동안 다시 쓰죠. 그것을 매일 하는 것이 제가 실천하고 있는 유일한 규칙일 것이고, 나머지는 다 혼돈입니다.”
한번 스타일을 갖게 되면 오랫동안 유지한다는 그는 긴 머리를 오랫동안 해오고 있다. 글쓰기 역시도. 그리하여 물을 많이 마시고 충분한 수면을 취한 카루나틸라카는 매일 새벽 4시부터 7시까지 인터넷을 끄고 책상에 앉아서 종이에 두꺼운 연필로 글을 쓸 것이다. 하루 이틀 사흘… 봄 여름 가을 겨울… 일 년 이년 삼 년….
“글을 쓰는 것은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시작이 가장 어렵죠. 저는 머릿속의 모든 목소리를 이해하고 글의 요점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합니다. 매일 일어나서 한 문장씩 차근차근 써 내려 가는 것 외에는 그 어떤 마법의 공식도 없어요. 대부분의 날엔 시간을 낭비하지만, 어떤 날은 페이지를 채우기도 합니다. 그리고 끝날 때까지 계속합니다. 이 책처럼 7년이 걸리더라도요.”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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