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곤의 정담] ‘사회참여형 지식인’부터 ‘권력의 들러리’까지
부정적인 평가의 논점은 주로 정부 정책을 정당화하는 들러리 역할에 모였다. 깊은 연구와 분석 끝에 퍼 올린 학자로서의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게 아니라, 각종 자문기구에서 정치인과 관료들이 내놓은 안을 추인하는 구실에 머무르는 것이 문제란 얘기다. 이들의 참여 창구인 여러 자문기구를 두고서는 “학자들에겐 세미나 장소, 정치인들에게는 교양대학이나 포토존 같은 곳”(신진욱 교수)이라는 평가도 나왔다.
정책은 지식의 형태를 띤다. 이른바 ‘정책지식’의 생애주기도 여느 상품과 다르지 않다. 생산과 유통, 소비 등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에서 살아남은 것이 제도화로 이어진다. 이 과정엔 여러 정책 행위자들이 참여하는데, 정책지식의 전문성을 앞세워 가장 다양한 모습으로 관여하는 게 바로 대학교수다.
이들은 마치 색색의 가면을 수시로 바꾸어 쓰는 중국 전통극의 변검술사와 같다. 때로는 강력한 의제제기자이자 정책생산자로서 날 선 주장을 내놓지만, 정치인이나 관료가 만든 정책을 추인, 정당화해주는 들러리 역할을 할 때도 적잖다. 몇몇은 대통령 또는 힘센 정치인에 의해 ‘간택’돼 대통령실이나 내각 고위직으로 옮겨 정책결정자로서 힘을 행사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대학교수는 과연 어떤 정책행위자인지 한마디로 정리하기 어렵다. 여러 교수들에 이 질문을 던졌더니 비슷한 답이 돌아왔다. 정책과정에 참여하는 점은 같아도 그 역할과 비중이 천차만별이어서 그 정체성을 “하나로 규정하기 어렵”(윤홍식 인하대 교수)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정책생태계에서 “하나의 동질집단으로 성격을 규정할 수 없는 정책참여자”라는 점에서 대학교수는 대통령, 정치인, 관료 등 공식적인 정책결정자는 물론 시민단체 활동가 및 노동운동가 등과도 구분된다.
신진욱 중앙대 교수는 ‘정책행위자로서 대학교수’를 크게 네 유형으로 나눈다. 우선 정책 활동의 장에 따라 ①정치영역 행위자와 ②학문영역 행위자가 있다. 두 유형은 다시 활동 지역 범위에 따라 ③전국형 ④지역형으로 나뉜다. 정책과정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대학교수는 ①과 ③의 조합인 ‘전국형 정치영역 행위자’이다.
이들은 “정치인들과 이해관계를 함께하면서 정무적이고 전략적 판단에 따라 정책을 선택하는 권력을 행사”한다. 아주 소수일 것이다. 적잖은 이들은 “정책의 질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유사 정치인이 되거나 그저 정치 엘리트의 종속적 파트너로 전락”하기도 한다. 같은 정치영역 행위자라도 정책 역량이나 상황, 주어진 역할에 따라 매우 다른 모습을 보인다는 얘기다.
학문 영역 행위자는 “정책 콘텐츠를 생산해 정치엘리트들에게 수용을 촉구하는 의제제기자”로서 기능한다. 때로는 “정책결정자와 직접적인 접촉 혹은 다양한 네트워크를 통해 간접적으로 정책 결정에 영향”을 끼친다. 특히 노동시민단체, 즉 시민사회 행위자들과 연대하거나 공론장에서 얻은 상징권력을 이용해 정책당국을 압박하기도 한다. 민주화 이후 국민기초생활보장법과 건강보험(통합)법 같은 각종 개혁 입법을 추동한 80~90년대 개혁적 교수들의 모습이 그랬다.
분명한 건 한국의 대학교수는 어떤 얼굴을 하든 정치·경제 등 분야 권력 엘리트들과 쉽게 친분을 맺을 수 있는 ‘연고 자본’을 지닌 ‘학벌체계의 수혜자’이며, 다른 어떤 나라 교수들보다도 많이 정책과정에 직·간접으로 잇대어 나름의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이다.
대학교수가 사회문제를 푸는 해법으로 어떤 정책 대안을 제시하고 또 정책혁신을 꾀할 원천지식을 얼마나 자유롭고 창조적으로 빚어내느냐, 정책과정에 얼마나 바람직한 영향을 끼치느냐는 정책지식생태계 활성화는 물론 한국사회를 더 나은 사회로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요소다. 사회의 발전은 결국 정책(지식)의 제도화와 혁신을 통해 이뤄지기에, 그 생산과 유통에 직접 관여하는 대학교수 역할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정책행위자로서 대학교수의 활동과 행태는 제대로 조명되거나 구체적으로 검증된 적은 거의 없다. 이들 활동과 구체적 역할의 양태가 워낙 다양한 데다, 드러난 듯하면서도 드러나지 않은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정책생태계에서 학계, 구체적으로 대학교수는 어떤 존재인가? 적극적인 정책지식 생산자인가? 아니면 그저 정책결정자들의 정당화 도구에 불과한가? 한국 대학교수의 정책 전문성과 역량 그리고 글로벌경쟁력은 어느 정도인가? 숱한 대학교수가 직·간접적으로 정책과정에 참여해왔고, 지금도 정책시장이란 무대의 위, 아래 또는 주변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지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제대로 탐구되거나 제시된 바 없다. 대학교수는 대한민국 정책생태계의 또 하나의 블랙박스이다.
그런 이유로 10여명 교수를 상대로 이와 관련한 설문을 진행했다. 대부분 안 그래도 할 말이 많았다는 듯 예상보다 긴 응답문을 보내주었다. 응답을 살펴보니, 교수들이 스스로 긍정보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더 많았다.
신광영 중앙대 명예교수는 “다수의 대학교수는 (정책생태계와) 직접 관련이 없고, 정책자문을 하는 교수들의 경우는 정부나 정치권이 만들어 놓은 정책에 권위를 부여하는 과정에 수단적으로 활용되고 있다”고 답했다. 이주하 동국대 교수도 “민주화 이후 (대학교수들이) 다양한 시민단체와 정부위원회에 참가해 유의미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평가하면서도 “속칭 폴리페서란 문제점을 드러내거나 정치 및 행정조직 장악력이 미흡해 정책결정 과정에 실질적 영향을 끼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양재진 연세대 교수 또한 “정책문제를 포착해 문제 해결을 위한 대안을 제시하는 면에서 (교수의 역할은) 바람직하다”면서도 “정치적·이념적으로 결정된 (특정 진영의) 정책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제공하거나 스스로 팩트를 취사선택해 선전선동하는 논리를 제공하는 등 해악도 크다”고 평했다.
부정적인 평가의 논점은 주로 정부 정책을 정당화하는 들러리 역할에 모였다. 깊은 연구와 분석 끝에 퍼 올린 학자로서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게 아니라, 각종 자문기구에서 정치인과 관료들이 내놓은 안을 추인하는 구실이나 하는 건 문제란 얘기다. 이들의 참여 창구인 여러 자문기구를 두고서는 “학자들에겐 세미나 장소, 정치인들에게는 교양대학이나 포토존 같은 곳”(신진욱 교수)이라는 평가도 나왔다.
이런 상황은 진보냐 보수냐 정부 성향에 따라 본질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윤석열 정부에선 노동시장개혁 권고안을 제시한 미래노동시장연구회가 “정부의 국정과제를 뒷받침하는 도구로 기능했다”(김종진 일하는시민연구소·유니온센터 이사장)는 평가를 받았다. 고용노동부가 노동개혁을 위한 “국민소통형 논의기구”라고 밝힌 이 기구엔 좌장인 권순원 숙명여대 교수를 비롯해 교수 12명이 참여했다. 문재인 정부의 대통령 소속 자문기구에 참여한 한 교수도 “정책제안을 공문서 형태로 했지만 제안한 문서가 어디로 갔는지도 알 수 없는 오리무중 상태를 여러번 경험했다”며 불쾌했던 들러리 체험을 털어놨다.
이런 부정적인 기류 속에서도 대학교수는 정책과정 참여는 필요하다는 쪽이 많았다. 사회에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는 건 지식인의 사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름을 밝히길 꺼린 한 현직 교수는 “주류에서 논의되지 않은 여러 논의를 공론의 장으로 옮긴다는 점에서 (교수의 정책참여는)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정책의 원천지식 생산자 및 이슈제기자’란 고유의 역할은 여전하고 더욱 강조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사실 오늘날 더 큰 문제는 지식인으로서 대학교수의 역할이 줄어들고, 그 결과 정책행위자로서 대학교수의 영향력도 급속히 약화하는 데 있는지 모른다. 한국사회 노동정책 논의와 관련된 수많은 장에 오랜 기간 참여해 온 이병훈 중앙대 명예교수는 “최근 대학 내 실적관리 강화에 영향받아 사회참여 및 비판적 지식인들의 역할이 크게 위축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지상파와 케이블방송, 유튜브 등 다양해진 미디어에서 지식이 매력적인 상품으로 시청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소비되는 ‘지식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지식인의 소멸’을 짙게 느끼는 시대가 바로 오늘이다. 하여, 이 시대 대학교수는 어떤 존재이고, 또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전국 모든 대학교수 앞에 던져진 질문이다.
이창곤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복지를 중심으로 노동, 주거, 환경 등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데 필수적인 요소와 정책에 특별한 관심을 쏟는다. 대한민국 정책생태계와 복지정치의 혁신 없이는 좋은 복지국가도, 질 높은 민주주의도 이뤄낼 수 없다는 생각에 정책 행위자를 탐구하는 이 연재칼럼 집필에 매진한다.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장과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상임이사를 지냈다. 지은 책으로는 ‘복지국가를 만든 사람들’, ‘복지의 문법’(공저), ‘성공한 나라 불안한 시민’(공저) 등이 있다.
g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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