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채운의 혁신탐구] 혁신기술 상용화 가로막는 R&D 지원

김충제 2023. 10. 24.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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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D 예산이 커질수록 시장보다 정부 바라보며 상용화 거리 먼 기술개발
5% 부족하다. 선진국의 엔지니어가 한국에 와서 우리 기업들이 개발한 첨단기술을 살펴보고 논한 평이다. 외국 테크기업들이 한국 기업의 기술을 채택하려고 검토하다 마지막 순간에 포기하며 하는 말이다. 기능적으로 우수하지만, 실제 사용하기에는 부족하다는 뜻이다. 특히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우리 기업이 개발한 기술의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은 고객이 '시장'이 아니라 '정부'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첨단기술 개발은 정부의 연구개발(R&D) 지원을 받아 이루어진다. 자금력이 부족한 중소벤처기업일수록 정부 과제 의존도가 높다.

정부 지원을 받은 경우 일단 개발한 기술이 작동하기만 하면 과제는 성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정부는 사용자가 아니다. 정부 과제용으로 개발한 기술에 대해서는 상용화에 필요한 실증을 안해도 된다. 심지어 베타테스트도 하지 않는다. 당연히 완성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기술은 단지 개발되는 것만으로 가치를 발휘하지 않는다. 개발된 기술이 진정한 가치를 창출하려면 시장에서 고객에 의해 선택되고 사용되어야 한다. 실리콘밸리의 테크기업들이 수많은 엔지니어를 고용하는 이유는 시장에 내놓은 기존 기술을 고객이 문제없이 잘 사용하도록 지원해 주는 것에 있다. 우리는 윈도(Window)를 사용하면서 수시로 업데이트 패치를 받아 드라이버를 업그레이드한다. 드라이버가 업데이트되지 않으면 최신 응용프로그램이 돌아가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 기업들은 개발 후 사용자 지원에 인색하다. 혁신기술을 시장에 도입하는 데 오랜 시간과 많은 노력이 소요되는 반면, 수익은 크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기술제품 시장이 작은 탓도 있다. 산업재 기술의 경우 고객이 까다로운 실증을 요구하는 것도 큰 부담이다. 바로 반도체 소·부·장(소재·부품·장비)에서 나타난 문제이다. 이런 연유로 중소기업의 R&D에 많은 예산이 투입되었지만, 상용화 실적은 저조하다.

대다수 기업은 새로 개발한 기술로 시장에서 돈을 벌지 못하므로 다시 정부 과제를 신청해 연구비 보조를 받으려 한다. 그런데 정부 과제는 중복지원이 안 되어 새로운 기술 개발을 제안해 신청해야 한다. 기업은 이미 개발한 기술을 묻어두고 다른 기술 개발로 옮겨 가는 것이다.

이런 풍토를 정부가 앞장서서 조장하기도 한다. 새로운 미래 기술이 등장하면 이를 선도한다는 명분으로 정부는 중점지원 기술을 바꾸고 여기로 예산을 집중한다. 정부가 유행처럼 신기술을 좇다 보니 시장과 상관없는 기술만 줄줄이 개발되는 결과가 나타난다.

외국 엔지니어가 "한국에는 없는 기술이 없지만 쓸만한 기술도 없다"고 한 말이 뼈아프게 다가온다. 첨단기술에 씨만 뿌리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다. 한때 거국적 지원이 이루어졌지만, 지금은 존재감도 없이 사그라진 '줄기세포 기술'이 대표적 사례이다.

R&D예산은 지난 3년 동안 10조원이나 늘어나 현재 30조원에 육박한다. 이 정도로 엄청난 재원을 정부가 투입했는데 시장에서 성공한 기술이 얼마나 되는가. 혁신성장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미래 기술의 R&D를 대거 지원한 정책이 오히려 기술의 상용화를 가로막고 있으니 역설적일 따름이다. 정부의 R&D예산이 커질수록 기업들은 시장보다 정부만 바라보며 상용화와 거리가 먼 기술 개발에 주력하게 된다.

최근 정부가 R&D예산을 대폭 줄이는 방향으로 정책을 선회한 것은 긍정적이다. 정부 지원에 안주해온 기관과 기업들의 금단현상은 심하게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시장을 도외시하고 정부 지원에만 의지해온 관행을 끊으려면 충격요법이 필요하다. 모험성이 높은 혁신기술의 초기 개발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필요하다. 다만 마중물 성격이어야 하고, 승부는 시장에서 판가름 나도록 유도해야 한다.

서강대 경영학과 명예교수 전 중소기업진흥공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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