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노-글로벌픽] 기대되는 '제2의 중동의 봄'…"역사는 계속된다"
사우디아라비아를 국빈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이 24일(현지시간)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와 43년 만에 한-사우디 공동성명을 채택했습니다. 두 정상은 교역과 미래지향적 산업 분야 투자를 확대하기로 약속하고 서울의 44배에 달하는 홍해 인근 사우디 사막에 신도시를 건설하는 ‘네옴(NEOM) 프로젝트’와 키디야 로신 디리야 등 기가 프로젝트 성공을 위해 협력하기로 했습니다. 윤 대통령의 국빈 방문을 계기로 한국경제인협회와 사우디 투자부는 지난 22일 46건의 양해각서(MOU)와 계약도 체결했다고 합니다. 이 와중에 현대건설은 지난 6월 사우디 내 석유화학 플랜트 건설을 수주한 데 이어 사우디 측과 투자 협력 MOU를 맺고 ▷사막지대 수자원 공급 ▷해수담수화 사업 ▷스마트시티 협력 사업 등 참여를 약속했습니다. 또 현대자동차그룹은 사우디 국부펀드와 연간 5만 대 규모 내연 전기차 합작투자 공장 설립 계약을 체결했는데요. 중동에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차 공장을 짓기로 한 것을 의미합니다.
대통령실은 “윤 대통령의 이번 사우디 방문을 계기로 156억 달러(한화 21조 원) 규모의 계약과 MOU가 이뤄졌다”면서 “지난해 11월 빈 살만 왕세자 방한 때 체결한 290억 달러(한화 39조2000억 원) 규모 MOU·계약까지 합치면 446억 달러(한화 60조3000억 원)에 달한다”고 평가했습니다. 국내외 유동성 위기에 우리 경제의 성장 모멘텀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에서 새 투자 기회 창출로 ‘제2의 중동의 봄’을 만들겠다는 전략이 현실화됐다고 본 겁니다.
대한민국 산업과 사우디의 인연은 1970, 80년대 ‘중동 건설’ 붐이 일었을 때 시작했습니다. 우리 건설사들은 1973년 사우디에 첫 진출한 뒤 1980년대 중반까지 해마다 최대 50억 달러(5조 원) 가까운 수주를 했다고 합니다. 이밖에 리비아 바레인 이라크 등 중동 건설 현장에서 10만 명 넘는 가장들이 벌어들인 ‘오일 머니’는 각 가정과 대한민국 성장의 밑거름이 됐습니다. 1980년대 후반 유가 하락으로 사우디 내 발주량이 급감하면서 ‘중동 특수’는 사라졌지만, 당시 머나 먼 중동 땅에서 사막의 사나운 모래 폭풍과 싸우며 돈 벌어 오는 아버지의 이미지는 1970, 80년대 산업 역군의 한 모습으로 많은 이의 뇌리에 각인됐습니다.
중동 경제는 1997, 98년 외환 위기 때 사우디 왕가가 국내 기업에 대규모 투자를 하는 등 우리 산업의 전환기나 위기 때 도약의 발판이 됐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 경제인들은 사우디 왕가와 친분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수년 전부터 중동지역 왕족들과 교류했으며, 2019년 6월 빈 살만 왕세자를 승지원에 초청하기도 했습니다. 승지원은 고 이병철·건희 회장의 집무실로, 삼성의 핵심 의사 결정이 이뤄지는 장소로 유명합니다. 이 회장과 빈 살만 왕세자의 회동이 승지원에서 이뤄진 점에 비춰 당시 미래 먹거리 발굴에 주력했던 삼성이 사우디 등 중동 시장 개척에 들였던 공을 짐작할 만합니다. 이후에도 이 회장은 빈 살만 왕세자와 만남을 지속해왔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 정부와 기업의 사우디를 향한 구애가 일방적인 ‘짝사랑’이기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사우디 역시 우리나라가 도움이 필요할 때 대가 없이 귀한 ‘오일머니’를 퍼준 것도 아니었죠. 중동 최대 부호 중 한 명인 알 왈리드 왕자는 1997년 외환위기 때 현대차와 대우에 각각 1억, 5000만 달러 투자를 했지만, 배당금 합의가 이뤄지지 않자 2001년 투자금 전액을 회수했습니다. 1970, 80년대 우리 건설사의 중동 진출이 현지 기업의 각광을 받았던 것도 솜씨 좋은 우리 근로자들 덕이 컸습니다. 사우디로 몰렸던 우리의 ‘1세대 중동 노동자’들은 공기에 맞춰 고층빌딩과 교량 도로 등을 흠 잡을 데 없이 튼튼하게 지었다고 합니다. 당시 지어진 사우디 수도 리야드의 고가도로는 일 잘하는 한국 건설 기술자의 상징이 됐습니다. 이후 사우디 정부 공무원들은 우리나라에 방문할 때마다 미완성 건설 프로젝트를 마무리 짓기 위해 근로자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는 후문도 남아있습니다. 결국 사우디가 마냥 손해 보는 장사를 한 게 아니며, 우리가 잘 해 ‘중동 특수’의 역사를 썼다는 이야기입니다.
아주 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도 중동 국가와 우리나라는 서로 매력을 느끼는 ‘상대국’이었습니다. 이는 학계가 신라로 이주해온 아라비아인으로 추정하는 처용 이야기와 통일신라 무역항, 고려 벽란도 등지에서 아라비아 상인들이 끊임 없이 선조들과 교류해온 역사가 말해줍니다.
사우디의 리야드는 현재 부산과 2030 엑스포 유치를 두고 경쟁 중입니다. 윤 대통령은 빈 살만 왕세자와 회담할 때 엑스포와 관련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양국이 서로를 자극하지 않으면서 선의의 경쟁을 하고,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간에 미래 지향적인 관계를 이어가자는 의미가 함축돼 있을 겁니다. 냉정한 국제 외교의 현장에서 서로의 매력에서 각자 나름의 실리를 취해온 외교 전통의 미덕을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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