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 연금개혁 난제, 백화점식으로는 못 푼다

권구찬 선임기자 2023. 10. 24.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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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앞두고 정치권 개혁 논의 실종
24개 안은 사회적 합의 험로 예고
그럴수록 정부안은 단순·명료해야
尹 “더 내고 덜 받는 것” 그 말대로만
[서울경제]
백상경제연구원 부국장

대선 후보 시절 윤석열 대통령의 국민연금에 대한 인식과 진단은 정확했다. 윤 대통령은 2021년 12월 관훈클럽 초청 대선 주자 토론회에서 ‘연금 공약이 아직 없는데 개혁을 약속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어느 정당이든 연금 개혁을 선거 공약으로 들고 나오면 무조건 지게 돼 있다”고 했다. 그래서 공약으로 구체적으로 내놓지 못했다고 솔직하게 인정하면서 “결국엔 더 내고 덜 받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연금 정치의 실상을 정확히 꿰뚫어 본 게 놀랍기도 했지만 ‘연금 개혁=선거 필패’라는 솔직한 발언이 꽤 인상 깊었다.

아닌 게 아니라 국회 국민연금개혁특별위원회는 가동 시한을 총선 이후인 내년 5월까지 연장했다. 여야가 지난 1년 동안 독자안조차 내지 않은 채 허송하다 선거가 다가오자 표 떨어질까 봐 연기한 것이다. 애초 정치권에는 기대도 안 했다. 연금 개혁은 욕 먹을 각오로 밀어붙여도 될까 말까 한데 표심에 민감한 국회가 먼저 팔을 걷어붙일 턱이 없다. 오죽하면 연금 개혁을 어렵고 위험한 코끼리 옮기기에 비유할까. 이럴 때일수록 정부가 총대를 메고 법제화를 견인하는 수밖에 없다. 과거 1998년과 2007년 두 차례의 연금 개혁이 그랬다. 2차 개혁 때는 정부안이 국회에서 부결되자 주무 장관이 항의 표시로 사표를 던지기도 했다.

한데 보건복지부의 태도가 영 미덥지 않다. 무엇보다 정부 자문위원회의 보고서가 정부 개혁안(종합운영계획)의 국회 제출 법정 시한(10월 말) 2주 전에야, 그것도 24개에 이르는 백화점식 안을 내놓도록 방치한 정부의 안이한 태도를 질타하지 않을 수 없다. 복지부가 촉박한 일정에 쫓겨 구체적인 수치 조정안을 담지 않고 구조 개혁 방향만 두루뭉술하게 제시할 것이라는 관측은 그래서 제기된다. 어쨌든 공은 정부로 넘어왔다. 이번 국회 제출안은 현 정부의 개혁 의지를 가늠할 리트머스 시험지가 된다. 정부가 국민연금이라는 거대한 코끼리를 옮기겠다면 몇 가지를 유념해야 한다.

첫째,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 조정 같은 모수(母數) 개혁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다른 연금과의 연계·통합, 기능 조정 같은 구조 개혁이 필요하지만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구조 개혁은 전체 연금 체계 전반을 바꾸는 방대한 작업이다. 개혁 전선을 확대하면 죽도 밥도 안 될 수 있다. 모수 개혁에는 정부 단일안이 선결 과제다. 그러지 않으면 개혁 진정성조차 의심받을 수 있다. 문재인 정부 때 그랬다. 현상 유지를 포함해 4개의 정부안을 내놓았으니 국민과 국회 설득은 언감생심이었다. 정 어렵다면 우선순위라도 정해야 한다. 고차방정식처럼 이것저것 다 고려하면 산으로 간다. 개혁 목표는 단순·명료해야 한다.

둘째, ‘더 주는’ 방안은 고려 대상이 되지 못한다. 개혁의 뜻이 무엇인가. 가죽(革)의 성질을 바꿀 정도로 피와 땀이 수반돼야 하는 것이다. 더 주는 것은 쉽고 편안한 선택이지만 개혁과는 거리가 멀다. 2차 개혁 때 보험료율의 정부 최초안이 15.9%였다는 것은 현 시점의 이정표를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24개 시나리오는 조합만 다를 뿐 죄다 과거에 검토했던 방안으로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결국 선택의 문제다.

셋째, 국가의 지급 보장을 명문화하는 데 신중해야 한다. 일견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아무런 실효성이 없다. 국가와 정부가 유지되는 한 연금을 못 받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오히려 훗날 추가 개혁 때 걸림돌로 작용할 우려가 크다. 공무원·군인연금처럼 세금으로 막으면 되지 왜 국민 부담을 늘리느냐고 하면 대책이 없다. 국민연금법은 ‘국가는 급여가 안정·지속적으로 지급되도록 필요한 시책을 수립·시행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기도 하다.

역대 정부는 2007년 이후 연금 코끼리를 단 한 발짝도 옮기지 못했다. 현행 9% 보험료율은 1998년 이후 25년 동안 요지부동이다. 현 정부더러 연금 개혁을 단칼에 성사시키라고 주문하는 것은 무리이고 그렇게 되지도 않는다. 완벽한 개혁은 없고 모두가 만족할 개혁은 더더욱 없다. 3차 개혁을 이뤄내야 4차, 5차 개혁과 구조 개혁으로 갈 수 있다. 오랫동안 주저앉은 연금 코끼리를 일으켜 세워 한 걸음 떼게 하는 게 급선무다. “결국엔 더 내고 덜 받는 것”이라는 윤 대통령의 말대로만 하면 된다.

권구찬 선임기자 chan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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