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이 될 수도, 복이 될 수도 있는 다양성
[세상읽기]
[세상읽기] 장영욱|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
영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넘어갔을 때 첫째아이는 만 두살이 안 됐었다. 박사 후 연구원으로 일하다가 코로나19로 인해 급작스럽게 귀국하기까지 약 1년 반을 그곳에서 지냈다. 어른들도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 쉽지 않은데 어린아이를 여기저기 옮겨 다니게 해서 늘 미안한 마음이었다.
그래도 한가지 위안이라면 아이에게 더 넓은 세계를 잠깐이나마 경험하게 해준 것이다. 남아공에선 ‘무지개국가’라는 모토 아래 백인, 흑인뿐 아니라 다양한 혼혈인종들이 섞여 지낸다. 민족에 따라 문화와 관습이 천차만별이고, 쓰는 언어도 다양해서 영어, 아프리칸스어 등 공용어가 11개에 달한다. 다양성을 측정하는 여러 지표에서 남아공은 늘 최상위권에 있다. 아이가 막 말을 배우고 타인과의 교감을 익힐 나이에 인종, 피부, 언어, 관습이 다른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릴 기회를 얻은 게 큰 복이라 느꼈다.
다양성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긍정적일 수도, 부정적일 수도 있다. 이질적 구성원 간 이해 충돌을 조정하는 공식, 비공식적 제도만 갖춰진다면 다양성의 긍정적인 효과가 더 크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서로 다른 기술, 경험, 능력, 관점이 만나 조화를 이룰 때 조직 혹은 사회의 생산성이 높아지고 창조적 발전이 이루어진다. 반면 새로운 가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집단 내 논리에 매몰돼 도태된 조직과 국가의 사례는 수없이 많다.
물론 다양성 증가가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몇몇 연구에 따르면 집단 내 이질성 증가는 단기적으로 구성원 간의 신뢰를 낮추고 갈등을 유발한다. 문화적, 인종적, 언어적, 종교적 차이는 상호작용의 중요한 장애물이다. 이로 인한 갈등은 때때로 물리적 충돌과 전쟁으로까지 번진다. 발칸반도에서, 르완다에서, 남수단에서, 그리고 가장 최근에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민족 간 무력 충돌은 수많은 사상자와 난민을 만들어냈다.
다양성의 유익이 실현되기 위해선 이 갈등이 잘 다뤄져야 한다. 한 경제학 논문은 아프리카의 낮은 교육 수준, 저조한 인프라 투자, 정치적 불안정, 그리고 그 결과 나타난 저성장이 상당 부분 너무 높은 민족다양성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민족다양성이 유사하게 높은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은 오히려 빠른 경제성장을 경험했다. 이 차이는 ‘제도’와 ‘접촉’이라는 두가지 상호보완적 요소로 설명할 수 있다. 폴 콜리어나 알베르토 알레시나 같은 경제학자들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통해 자원 배분을 둘러싼 갈등이 적절히 조율될 때 다양성으로 인한 편익이 그 비용을 넘어서게 된다고 설명한다. 제도적 틀 아래 이질적인 사회구성원 간 더 많은 접촉이 일어나면 다양성의 유익은 더 커진다. 부딪히고 또 소통하는 과정을 통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조화를 이뤄가는 방법을 익히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 나와 피부가, 문화가, 생각이, 삶의 형태가 전혀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그들의 생각을 존중, 수용하게 되기까진 적지 않은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단일민족’을 강조하며 누구보다 배타적인 사람들을 키워낸 우리나라에선 그 일이 더 어렵지 않나 싶다. 최근 십여년 사이 외국인 주민이 눈에 띄게 많아졌지만 우리나라는 다양성 지표에서 여전히 제일 아래쪽에 있다. 전쟁을 피해 도망온 난민 수백명조차도 피부색과 문화가 다르다는 이유로 두려워하고 거부하던 게 불과 몇해 전인 걸 보면, 우리나라에서 다양성의 유익을 누리기까지 시간이 더 필요할 듯싶다.
그래서 우리 아이가 한 경험이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계속 그곳에 있으면서 자연스럽게 다양한 삶의 형태를 경험했다면, 인종이, 피부색이, 부의 수준이, 배움이, 종교가, 언어가, 건강 상태가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배척하지 않고, 그들이 가진 다양한 배경을 통해 겸손하게 배움을 넓히고 이를 창의적으로 재해석해내는 과정이 더 수월해지지 않았을까. 한국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이 이 복을 누리지 못하란 법은 없다. 더 다양한 사람들이 들어와 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으로 교류할 수 있도록 국경을 여는 동시에, 그 사이 발생할 수 있는 갈등 요소를 조정하는 제도를 갖춰나가는 일을 어른들이 감당한다면 말이다. 갈등을 증폭시키며 문을 좁히려는 사람들은 특별히 경계할 필요가 있다. 다양성이 열매 맺는 사회는 거저 오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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