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라이프이스트-손주에게 물려줄 아버지 고사성어] 높이 오르려면 낮은 곳에서 출발해야 한다
중학교 1학년 때 국어를 담당하던 여선생님이 작문 숙제를 내줬다. 자유 주제였다. 자기가 쓰고 싶은 글을 형식에 상관없이 써오라고 했다. 잘 쓰고 싶었다. 몇 날을 끙끙댔다. 숙제를 내야 하는 전 날밤엔 늦게까지 책상에 앉아있었다. 평상시와 다른 행동을 눈치챈 아버지가 사정을 듣자 대뜸 “잘 쓰려고 그러는구나”라고 했다. 이어 “자유 주제가 어렵다. 그래서 엄두가 안 나는 거다”라고 했다. ‘엄두’란 말을 그날 처음 배웠다.
엄두는 한자어 ‘염두(念頭)’에서 온 말이다. 염두에서 엄두로 변하는 현상을 변음이라고 한다. 한 몸에서 나온 엄두와 염두는 부정적인 의미와 긍정적인 의미로 각기 변했다. 염두는 마음의 속이나 ‘생각의 맨 처음’이라는 말이다. 우리말처럼 된 엄두는 흔히 부정적인 말과 어울려 쓴다. ‘감히 무슨 일을 하려는 마음’이라는 뜻이다. ‘엄두가 안 난다’라는 말은 어떤 일을 시도하기가 두렵거나 어려운 경우에 쓴다. ‘엄두 나기’는 조선 시대에 쓰던 말로, ‘엄두’와 ‘나다’라는 두 단어가 합쳐진 말이다.
아버지는 글 쓰는 엄두가 나지 않는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했다. “첫 번째는 두려움 때문이다. 실패하거나, 실망하거나, 상처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두 번째는 부족함이다. 네가 능력이 부족하다고 느끼면 도전하기 어렵다. 성공할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네가 글을 써본 일이 없을 테고 쓴 글이 없으니 실패한 적이 없어 글쓰기가 두려운 것은 아니라고 아버지는 지적했다. “네가 잘 쓰려는 마음이 엄두가 나지 않게 하는 원인이다”라고 진단했다.
“엄두가 나지 않는 이유를 이해하면, 극복하기 쉽다”라고 전제한 아버지는 “두려움은 정면으로 맞서 극복해야 한다. 네가 앓고 있는 부족함은 능력을 개발하고, 자신감을 키워가는 노력으로만 극복할 수 있다”고 방안을 제시했지만, 그때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날 아버지는 “아마추어 사진사는 내가 찍을 저 피사체가 걸작이 될까 망설이다 기회를 놓치고 만다. 프로는 찍어야 할 상황이면 셔터를 먼저 눌러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는다. 사진을 펼쳐놓고 나중에 걸작을 고른다”며 생각을 멈추고 먼저 시작하기를 권했다.
아버지는 “뭘 쓸지 목표를 정해라. 큰 목표는 두려움을 더 크게 느끼게 만들 수 있다. 작은 목표부터 시작해 점차 목표를 키워가는 게 좋다. 목표가 정해졌으면 ‘나는···’으로 시작해라”라고 구체적으로 일러주며 “엄두가 나지 않으면 작은 일을 염두에 둬라”라고 했다. 이튿날 숙제를 검사하던 선생님이 “잘 썼다”고 칭찬하며 내 작품을 낭독하라고 했다. 아버지가 가르쳐준 대로 ‘내가’로 시작한 작문은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서로 다른 점을 느낀 대로 쓴 글이었다. 처음 입은 교복이며, 한자로 된 명찰, 훨씬 큰 학교, 과목마다 다른 선생님이 가르치는 일 등을 겪은 대로 썼다. 익숙해지지 않아 많이 힘들었지만, 초등학교 때 익숙했던 교정에서 밟던 눈, 느티나무 등이 거기에도 똑같이 있어 친구가 돼줘 낯설지 않았다는 글이었다.
집에 돌아와 선생님이 “훌륭한 글”이라는 칭찬을 했다는 얘기를 궁금해하는 아버지에게 바로 자랑했다. 그때 아버지가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라며 가르쳐준 고사성어가 ‘등고자비(登高自卑)’다. 중학교 들어가 처음 배운 고사성어다. 높은 곳에 오르려면 낮은 곳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뜻이다. 다시 검색해보니 중용(中庸) 제15장에 나온다. “군자의 도(道)는 비유하자면, 먼 곳을 감에는 반드시 가까운 곳에서 출발함과 같고, 높은 곳에 오름에는 반드시 낮은 곳에서 출발함과 같다”라는 말이다. 모든 일은 순서에 맞게 기본부터 이루어 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그날 아버지는 “남의 삼 층 정자를 보고 샘이 난 사람이 목수를 불러 일 층과 이 층은 짓지 말고 아름다운 삼 층만 지으라고 했다는 일화가 불경에 나온다”라며 “공부는 물론 모든 일이 다 마찬가지다. 허황한 결과만을 공상하면 그 어느 것도 이룰 수 없다. 모름지기 낮은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무슨 일을 하기 위해 엄두를 내려면 자신이 가진 능력을 믿는 게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얼마일지도 모르는 자신의 능력을 믿으면, 두려움을 극복하고 시도해볼 힘을 얻을 수 있다. 꾸준하게 애써 나를 믿는 자신감은 온전하게 자신이 노력해야 얻을 수 있는 인성이다. 손주들에게도 반드시 물려줘야 할 성품이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조성권 국민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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