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싸한 '재밍'의 고통! 크랙 등반을 알게되다
지난 10월 14일~15일 이틀 동안 충북 제천의 저승봉 일대에서 제5회 트래드클라이밍페스티벌이 열렸다. '크랙 등반이 좋은 사람들'이 주최하고 노스페이스, 블랙다이아몬드가 후원했다. 행사 기획자 이명희 스태프는 "이 행사는 암벽등반 기술만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라며 "자연과 사람을 존중함과 동시에 등반지를 훼손하지 않고 본존하여 미래의 클라이머들과 공유하기 위한 취지"라고 행사 개요를 설명했다. 페스티벌 참여자의 참가기를 싣는다.
EP1 첫째 날, 트래드 클라이밍 기술의 참맛
텐트(학현리 오토캠핑장)안에서 일어났다. 날씨가 약간 쌀쌀했다. 지금 침낭 밖으로 나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몸을 일으켰다. 텐트 밖에는 아침 일곱시부터 전국 각지에서 이번 페스티벌을 지원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떠들썩했다. 트래드 클라이밍 페스티벌 스태프 이명희, 최석문씨가 운영하는 '공감 클라이밍 스쿨' 졸업생 열 명 정도가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트래드 클라이밍 페스티벌에는 특별한 문화가 있는데, 한 회라도 이 행사에 참가한 사람은 다음 페스티벌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트래드 클라이밍의 매력을 느끼게 하고 싶은 주최측의 고민이 담긴 결정이다. 덕분에 이전 참가자들은 자연스럽게 다음 페스티벌에서는 지원스태프로 참여한다. 행사가 자생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요인 중 하나다.
아침 식사가 끝나자 참가자들의 차량이 캠핑장에 속속 도착했다. 다양한 연령대의 참가자들은 등록부스에서 클라이밍 테이프로 만든 본인의 명찰과 후원사에서 준비한 선물을 받아들고 삼삼오오 모여 텐트를 치러 갔다. 그중 외국인 참가자가 한 명 눈에 띄었다. 잠시 얘기를 나눴다. 자크(Zach)라는 친구였는데, 주한 미군이었다. 한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한국말을 거의 하지 못했다. 혼자 트래드 클라이밍 페스티벌에 참가하기 위해 한글로 된 신청서와 고분분투했을 장면이 떠올랐다. 용기내어 참석한 그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하룻밤을 보낼 각자의 자리를 마련한 참가자들은 필수 준비물이었던 캠핑 의자를 펴들고 메인 행사장으로 모여 자리잡았다. 참가자는 전체 약 40여명 정도됐다. 김우경(블랙다이아몬드) 스태프가 단상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그가 말했다. "제5호 트래드 클라이밍 페스티벌 시작합니다!" 저승봉 개척부터 현재의 페스티벌까지 중심적인 역할을 해온 이명희, 최석문, 문성욱, 안종능 등 주요 스태프들이 소개됐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다양한 배경의 클라이머들은 기대 가득한 눈빛이었다.
문성욱 스태프의 트래드 클라이밍에 대한 소개를 시작으로 장비에 관한 설명이 이어졌다. 나는 캠과 너트에 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 대충 '바위 틈새에 넣고 잘 버텨주면 끝'이라고만 취급했다. 문성욱 스태프가 자세하고 명쾌하게 설명했다. 확보용 장비는 확보지점의 사이즈에 맞게 조절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액티브(능동)형과 패시브(수동)형으로 구분된다는 것, 힘이 작용되는 원리에 따라 크게 벌리는 힘, 회전시키는 힘, '쐐기 힘' 이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는 점 등을 새롭게 알았다. 그동안 좁고 좁았던 나의 등반 세계가 이론적으로 확장되는 것 같았다. 클라이밍 대학교 트래드 클라이밍 전공 교수에서 강의를 듣는 기분이었다.
이명희 스태프는 재밍 글러브 만들기를 강의했다. 그녀의 설명에 따라 모두 본인의 손에 꼭 맞는 재밍 장갑을 만들었다. 클라이밍 테이프의 용도를 제대로 체험한 순간이었다. 발견과 발전! 이것은 나에게 큰 기쁨이었다. 나의 클라이밍 경력은 자그마치 10년이다. 하지만 단 한번도 등반에 깊게 들어가본 적 없었다. 그저 잘하는 친구들을 따라다니거나 선배들이 시키는 대로만 했다. 그야말로 '수동적'이었다. 이런 나에게 초보자 맞춤형으로 너무나도 쉽게 트래드 클라이밍에 관한 핵심들을 알려주니 기쁠수밖에 없었다.
이어진 '재밍 기술'에 관한 강습 시간에서도 기존의 얕은 지식을 다시 한 번 돌아볼 수 있었다. 단순히 주먹이나 손모양을 바위 틈새 모양에 맞게 만들어 끼워 넣기만 하면 되는 건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엄지손가락을 손바닥쪽으로 접어 바위 틈새에 끼워넣는 핸드 재밍의 원리는 바로 엄지 손가락 아래 손바닥 부분을 '부풀려서 채워넣는 것'이었다. 왜 여태껏 핸드 재밍시에 그렇게 쉽게 손이 미끄러지거나 풀려버리는지 깨달았다. 양손을 번갈아 가며 재밍하는 '핸드 오버 핸드' 기술은 비교적 평이한 크랙에서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사용한다는 것과, 한손이 위로 가고 아랫손이 계속해서 따라가며 재밍하는 '스위밍'이라는 기술은 대게 사선 크랙에서 사용한다는 것도 비로소 알게됐다. '아, 그래서 내가 사선크랙만 따라가면 그렇게 허우적거렸었구나!'
가장 기본적인 핸드 재밍을 시작으로 그것보다 작은 크랙에서 사용하는 핑거 재밍, 핸드 보다 점점 더 커지면서 두손을 교차하기도, 주먹(피스트)을 사용하기도 한다는 것도, 그리고 발이든 손이든 재밍 한 후에는 크랙의 선과 수평이 되어야 재밍이 잘 된다는 것도, 발 재밍도 크랙 크기에 따라 종류가 있다는 것도 차근 차근 배웠다. 그러는 사이에 벌써 오후가 되었고 강의가 끝난 다음, 몸으로 익히기 위한 실습이 이어졌다. 총 여섯 개 조로 나뉘어 조별로 돌아가면서 다양한 크랙에 손과 발, 무릎 등을 끼워서 비틀며 올랐다. 손과 발 끝에 느껴지는 고통에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 특이한 사람들 사이에서 나도 손과 발을 목재 틀 사이에 끼워 넣어 '부풀리고' '비틀며' 오름짓을 했다. 그리고 곧 그 알싸한 재밍의 고통과 매력에 빠져들었다.
EP2 소나기, 산의 매력
"우르릉 쾅쾅" 오후에 비 예보가 있어 예상은 했지만, 실습이 끝나갈 즈음 한여름 소나기 내리듯 갑자기 많은 양의 비가 쏟아졌다. 모두 당황했지만 스태프들은 차분했다. 그들은 미리 마련해둔 천막을 쳤다. 참가자들도 이를 도왔다.
'크랙 페스티벌에서 비라니..' 당장 오늘 미니게임 뿐만 아니라 내일 저승봉에서 등반을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많이 아쉬웠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렇게 비오는 상황이 익숙하기도 했다. 등반하러 갔다가 비가 와 등반을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니까. 이런 상황에서는 '힘들게 시간을 내서 왔지만 등반을 못하게 되었다'라는 부정적인 감정에 집중하기 보다는, 이 또한 자연스러운 자연의 섭리임을 알고 받아들이는 게 마음이 편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쨌든 우리는 산에서, 그리고 바위 틈 사이에서 몸을 움직이는 게 좋아서 모인 사람들이었고, 이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이 페스티벌에, 그리고 산에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생각이 들면서 이내 마음이 편안해졌다. '만약 내일 등반을 못해도 저승봉은 항상 거기 있다. 또 오면 된다'라는 생각을 했다. 아쉽지만 오후 일정은 조금 일찍 마무리됐다.
EP3 올바른 클라이밍 문화에 관하여
폭우가 내리긴 했지만 다행히 비는 지나갔다. 비가 그치고 선선한 공기를 맡으며 저녁식사를 하고 다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였다. 페스티벌에서 또 한가지 기대되는 프로그램이었던 '트래드 클라이밍 문화'에 대한 대화와 토론을 위해서였다. 이명희 스태프의 '등반 문화, 트래드 클라이밍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그녀는 지금 한국에선 외국에 비해 짧은 기간에 급격하게 확산되어 트래드, 스포츠 구분이나 개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채로 무분별한 볼팅, 닥터링 등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했다. 미성숙한 행동으로 인해 등반지가 폐쇄되기도 하는 국내 현실을 확인했다. 이명희 스태프의 한 마디, 한 마디에는 진심이 묵직하게 담겨 가슴 속에 아주 무겁게 와 닿았다. 발표 후에는 이어서 스태프들이 직접 기획하고 참여했던 '울산바위 정면 우측크랙(비너스길)' 볼트 제거 사례를 기록한 영상이 상영됐다. 참가자들도 함께 둘러앉아 트래드 클라이밍 문화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밤바람이 선선했다. 사람들은 각자가 하는 이야기에 집중했다. 나는 이것이 국내 클라이밍 문화가 아주 조금씩 성숙해지는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EP4 둘째날 - 페스티벌의 꽃, 재밍 줄다리기!
둘째 날 아침이 밝았다.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다. 날씨도 괜찮았다. 오전에는 어제 비로 진행하지 못했던 재밍 미니게임이 진행됐다. 모두가 머뭇거리는 분위기 속에서 용기있는 한 두분이 앞으로 나가면서 게임이 시작됐다. 남성 참가자들의 승부욕 넘치는 재밍 턱걸이에서 평소 친분이 있던 홍건희씨는 재밍을 한 상태로 턱걸이 PB(Personal Best)를 찍고 말았다. 게임과 승부욕이 이렇게 무섭다는 걸 느꼈다. 이어 여성부 재밍 오래 매달리기가 열렸다. 평온했던 참가자들의 얼굴에 고통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면서 모두 얼마 지나지 않아 똑 떨어졌다. 떨어지고 나면 고통에 찡그렸던 얼굴엔 환한 웃음꽃이 폈다. 이 순간 만큼은 누구보다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 덕분에 구경만 하고 있는 나도 게임에 나간 것 같은 생생한 기분이 들었다. 요즘 운동을 통 하지 못하고 체중도 불어 턱걸이는 차마 지원하지 못했는데, 이어진 재밍 줄다리기에서는 체중이 많이 나갈 수록 유리하다기에 용기내어 참가했다. 재밍 줄다리기는 핸드 재밍 사이즈의 나무 상자를 줄로 양끝에 연결해 각자 재밍을 하고 줄다리기를 해서 끝까지 버티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었는데, 애석하게도 나무 상자에서 내 손이 먼저 빠져버리면서 예선에서 탈락했다. 금세 경기가 끝났지만 아주 많이 즐거웠다.
EP5 저승봉 등반하다
바람이 많이 분 덕분에 바위 상태가 생각보다 좋아서 저승봉에 등반을 하러 갈 수 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짐을 챙겨 다시 모인 우리는 페스티벌의 대미를 장식하러 저승봉으로 향했다. 어제부터 열심히 듣고, 배우고, 연습하고, 게임도 하며 익힌 '즐거운' 재밍을 직접 산에서 해보러 가는 것이다. 이보다 더 설레는 일이 최근에 있었을까? 운이 좋았다. 삼삼오오 모여 저승봉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저승봉 어프로치는 짧지만 가파르고 험한 길로 악명이 높지만, 이날 만큼은 수월한 기분이었다. 참가자들은 크게 두팀으로 나눠 한팀은 저승봉 위쪽을, 한팀은 아래쪽 루트를 중심으로 실습했다. 나는 아래쪽 루트를 푸는 팀에 속해 '이상과 현실', '묻지마', '가족사진' 총 세 크랙 루트에서 재밍 연습을 했다. 첫번째 루트부터 참 인상적이었는데, '이상과 현실'이라는 루트명처럼 클라이밍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내려오는 순간까지 이상과 현실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송원석 스태프의 시범과 문성욱 스태프 설명을 들으면서는, '아, 크랙 속에 저렇게 손을 넣고, 아 저기에서는 '썸업(Thumb up)'으로 가고, 저곳에서는 손목이 걸리는 구간이니 쐐기 작용을 이용해서 가면 되겠다!'라고 계산했다. 하지만 현실은 많이 달랐다. '어쩜 이렇게 루트 이름을 잘 지었을까!?' 이후 '묻지마'라는 루트에서도, 루트명처럼 누구든 나에게 아무 것도 묻지 말아줬으면 하는 순간이 시작부터 끝까지 계속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위에서 직접 되든 안 되든 배운 기술들을 시도해보니 무척 재미있었다.
중간 중간 좌절할 때에도 '처음에는 안되는게 당연한 겁니다.'라는 친절한 스태프들의 말에 좌절하지 않고 계속 시도했다. 덕분에 즐거운 마음으로 저승봉에서의 순간들을 즐겼다. 비록 시간이 부족해 멋진 사선 크랙인 '가족 사진'은 시도해보지 못했지만 최석문 스태프의 멋진 시범과 다른 분들의 시도를 눈에 담아보며 '아쉬움이 있어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지. 다음에 꼭 와서 해봐야지'라는 다짐을 하며 발길을 돌렸다. 하산하던 중 누군가 "와!"하고 소리를 질렀다. 멀리서 노을이 지고 있었다. 덕분에 짜릿했던 주말이 환상적으로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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