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프레 왜 할까? 애니 덕후들의 축제 ‘서울 코믹월드’ 방문기 [브랜더쿠]
‘브랜더쿠’는 한 가지 분야에 몰입해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덕후’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자신이 가장 깊게 빠진 영역에서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어 내고, 커뮤니티를 형성해 자신과 비슷한 덕후들을 모으고, 돈 이상의 가치를 찾아 헤매는 이들의 이야기에 많은 관심 부탁합니다. |
우린 모두 한때 애니메이션을 좋아했다.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됐지만 말이다. 기자의 경우, TV 앞 대신 동네 만화 대여점을 매일같이 드나들며 원작의 매력에 빠졌다. 하지만 스스로 오타쿠라 생각하진 않았다. 범접할 수 없다고 생각한 영역이 있었다. 바로 '코스프레'.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면서도 작품 속 인물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어떤 계기로, 왜 코스프레를 하게 되는 걸까? 코스프레 문화에 대한 대중의 인지도 자체는 높아졌지만, '코스어(코스튬 플레이어)'의 얘기는 쉽게 찾기 힘들었다. 이에 직접 들어보기로 했다. 국내 가장 큰 만화 행사라는 서울 코믹월드. 지난 8월 5일과 6일 양일간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173회 서울 코믹월드에 행사 첫날인 5일 방문했다.
코믹월드는 어떤 행사? |
'코믹월드(Comic World)'는 1999년 서울, 2000년 부산에서의 첫 행사를 시작으로 25년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국내 대표 만화 행사다. 일러스트, 팬시 굿즈 등을 판매하는 부스와 함께 코스프레 무대, 웹툰 작가와의 대화 등 다양한 이벤트가 마련된다. 소규모 마니아들만 찾는 행사였지만,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대한 인기가 높아지면서 코믹월드에 대한 인지도도 높아졌다. 최근엔 게임, 웹소설, 버추얼 아이돌 등 다양한 서브컬처를 아우르는 대형 행사로 발전했다. 수도권과 부산 두 지역에서 열린다. |
여긴 어디, 나는 누구…
행사 당일, 킨텍스 전시장 내부는 평범한 옷을 입은 이를 세는 게 더 빠를 정도로 많은 코스어로 가득했다. 고작 한두 발 내디뎠을 뿐인데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문을 지나온 것만 같았다.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인가… 생경한 광경에 조금 위축됐다. 하지만 용기를 내 몇몇 코스어들에게 사진을 요청하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영화 속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아이언맨 슈트를 입은 코스어는 멀리서부터 많은 이의 시선을 강탈했다. 서양인 체형에 맞게 나온 코스튬을 직접 본인 키와 체형에 맞게 개조했다고. 무려 1000만 원 넘는 투자의 결과라는 설명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첨단 기술의 총 집체인 영화 속 아이언맨 슈트처럼, 얼굴 부분의 슈트는 착용자의 음성을 인식해 자동으로 작동되고 작은 디테일들이 살아 있었다.
즐겨 보던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를 만났을 땐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 친구를 다시 만난 듯 반가웠다. 국내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무협 만화 '나루토' 속의 '사스케'와 '사쿠라'가 대표적이다. "코스프레를 하며 알게 된 친구 사이"라는 21살의 두 코스어는, 반가움에 동동거리며 사진을 요청하는 기자에게 "역시 우린 모두 닌자의 후예"라며 화답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와 코스어들의 친절함 덕에 점점 긴장이 풀렸다. 분위기에 익숙해지니 한 명 한 명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단순히 캐릭터의 외적인 모습을 따라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시그니처 포즈, 심지어 표정마저 복사 붙여넣기 하며 캐릭터를 현실 세계로 불러왔다. 기대 이상의 완성도와 프로페셔널한 모습에 단순히 작품을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이렇게까지 하긴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비 기간이 얼마나 들었냐는 질문에는 모두 "최소 20일 이상"이라고 답했다. 코스프레에 필요한 의상과 소품을 해외 직구 혹은 주문 제작을 통해 구매하는 경우가 많아 배송일을 고려해 준비를 일찍 시작한다고 한다. 비용도 만만치 않다. 애니메이션 '가면라이더'를 팀 코스프레한 코스어는 "퀄리티가 높은 코스프레는 웬만한 직장인 월급에 달하는 돈을 투자해야 한다"고 귀띔했다.
코스프레 할 캐릭터는 어떻게 골랐냐 물으니 대부분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를 고른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본인의 외형적 특징에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은 캐릭터를 고르거나 같은 테마 혹은 등장인물 군단을 구현하기 위해 팀을 이루어 역할을 분담하는 ‘팀코(팀 코스프레)’를 한 경우도 있었다.
이제 낯선 문화가 아닌 코스프레
게임 '원신'의 '알 하이탐'이라는 캐릭터 코스어 창천(가명)과는 더 깊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에게 코스프레 입문 계기를 묻자 "중학교 3학년 때 친구를 따라 우연히 코믹월드를 처음 방문했다"며 운을 뗐다.
"행사의 존재는 알고 있었는데 직접 가볼 생각까진 못하고 있었어요. 그러다 친구의 제안으로 코믹월드에 방문했는데 가슴이 두근거리더라고요. 애니메이션과 게임을 좋아하는 데다 장래 희망이 모델이었던 지라, 두 재미를 한 번에 충족할 수 있는 취미가 될 것 같았습니다."
2012년 코스프레를 시작한 창천은 처음 코스프레를 시작할 때만 해도 안 좋은 시선이나 편견에 많이 부딪혔다. 당시만 해도 코스프레는 낯선 문화였고 '오타쿠'라는 단어와 애니메이션이 깊이 빠져있는 사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아, '남들 앞에서 광대 노릇 하는 거 아니냐', '그게 정상적인 취미냐' 등 폄하 당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는 최근 코스프레에 대한 인식과 분위기가 달라졌음을 체감한다. "코스프레에 전혀 관심 없던 '머글' 친구도 행사장 구경을 하고 싶다거나 같이 행사에 가자고 먼저 제안할 정도"라고 웃으며 "e스포츠 시장과 연계돼 대중에게 한결 친숙한 문화가 된 것 같다"고 덧붙였다.
꾸준히 코스프레를 해온 그는 2014년 12월 개최된 서울 코믹월드의 콘테스트에서 남코스어 부문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코스프레가 아니면 그런 경험을 어떻게 했겠냐"는 그는 수많은 사람의 환호성을 받으며 무대에 올랐던 기억과 당시의 짜릿함과 감동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한다.
애니메이션과 현실을 잇는 새로운 자아
최근 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크게 흥행하고 아이돌이 댄스 챌린지로 애니메이션 장면을 따라 추는 등 애니메이션이 다시 대중문화 영역으로 넘어오고 있다. 코스프레는 그렇게 좋아하게 된 작품과 캐릭터에 대한 헌정이자, 애니메이션과 현실을 잇는 새로운 세계관 속 자아를 만들어 내는 일이었다.
앞뒤 계산 없이 순수하게 좋아하는 마음에선, 특유의 긍정적인 활력과 에너지가 우러난다. 그리고 같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모이면 이 활력과 에너지는 두터운 공기 층처럼 주위를 에워싸고 마음을 둥둥 떠오르게 한다. 직접 코스어를 만나보니 그 분위기에 흠뻑 젖어들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현실을 잊고 애니메이션 OST를 부르던 어릴 적으로, 만화 대여점을 드나들던 학창 시절로 돌아갔다. 누군가는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속으로, 또 누군가는 게임 속으로 빠져들 터였다.
"코스프레를 하는 순간만큼은 팍팍한 일상에서 완벽하게 탈출할 수 있어 큰 활력이 되는 데다, 코스프레를 하지 않았다면 못 했을 새로운 경험들이 즐거워요. 코스프레를 통해 소소한 자아실현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코스어 창천)
행사 당일, 최고 기온은 35도를 육박했고 전국 곳곳 폭염경보가 발령됐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가발을 쓰고 겹겹의 코스튬을 입고 돌아다니는 건 분명 쉽지 않아 보였다. '오타쿠'면 뭐 어떤가. 애정을 쏟을 수 있는 취미가 있고, 그 취미가 자아를 실현하는 수단이 된다는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닐까. 날씨에도 편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로 구축한 세계를 유영하는 그들이 멋있고 부러웠다. 모두가 단연 주인공이었다.
인터비즈 지희수 기자 heesu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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