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색이 주는 치유… 거장, 지친 영혼 위로하다
‘후기 연필묘법’ 단색화 포함
대형판화 작품 등 25점 걸려
하늘·바다·단풍… 색감 살려
관객들, 그림 보는내내 ‘편안’
“30년 전 서울서 부산으로 오는 게 편한 길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전시를 열 때면 정창섭, 윤형근, 김창열, 이강소 등 기라성 같은 작가들을 모두 끌고 오세요. 함께 작업도 하고, 신랄하게 미술비평도 하셨죠. 아마 부산이 사랑방이었을지도 몰라요.”
한국 현대미술에 한 획을 긋고 지난 14일 떠난 고 박서보(1931∼2023) 화백에게 부산은 오랜 기억이 서린 장소다. 서울에서 내로라하는 화랑은 물론 한국인으론 처음 영국 런던 화이트큐브에서 개인전을 열었던 그의 그림은 미국 뉴욕, 프랑스 파리 등 전 세계 곳곳을 누볐지만, 가장 자주 걸린 곳은 부산이라 할 수 있다. 1991년 부산 조현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연 뒤 올해까지 여기서만 14번 전시를 했으니, 2년마다 이곳에서 자신의 신작을 선보인 셈이다. 구순(九旬)의 나이에도 소통을 놓지 않았던 그가 마지막 남긴 소셜미디어 글도 지난달 가족들과 조현화랑에서 진행 중인 자신의 개인전을 보기 위해 부산을 찾아 적은 “오랜만의 바다 내음이 좋네”였다. 화랑 설립자인 모친 조현 씨의 기억을 빌려 시끌벅적했던 30년 전 박서보의 부산행(行)을 떠올린 최재우 조현화랑 대표가 “박서보의 예술이 곧 우리 화랑의 역사”라고 말한 이유다.
조현화랑 달맞이점과 해운대점에서 8월 31일부터 진행 중인 박서보 개인전은 그래서 더 특별하다. 갑작스러운 별세로 이곳에서 진행 중인 14번째 전시가 ‘박서보 유작전’(遺作展)이 됐기 때문이다. 지난 5일 홍콩 소더비 경매에서 1976년 작 묘법 작품 ‘№ 37-75-76’이 260만 달러(약 35억 원)에 낙찰돼 종전 최고가를 경신하는 등 ‘단색화’ 거장에 대한 미술계의 관심이 높아지는 시점에서, 부산은 박서보의 노년 작품세계를 가늠하고 그의 마지막 메시지를 읽을 수 있는 장소가 됐다. 실제로 부고가 전해진 이후 박서보의 ‘찐 팬’을 비롯해 미술애호가들의 관람 발길이 부쩍 늘었다. 당초 11월 초 막을 내리려던 조현화랑도 전시 기간을 12월까지 연장했다.
전시는 세라믹 묘법 6점과 대형 판화 작품 4점을 포함해 25점이 걸렸다. 이 중 2020년대를 기점으로 그리기 시작한 ‘후기 연필 묘법’ 작품 12점이 눈길을 끈다.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라는 미술계의 기억처럼 묵묵히 많은 선을 긋는 그의 ‘묘법’(escrite) 연작은 유백색의 밑칠이 마르기 전 연필로 선을 반복하는 ‘전기 묘법’과 캔버스에 한지를 여러 장 덧바르거나 문질러 불연속적인 선을 보여준 ‘중기 묘법’을 거쳐 물감에 한지를 풀어 갠 것을 긋거나 밀어내는 방식의 ‘후기 묘법’으로 구분된다. 이번 후기 연필 묘법에선 초심으로 돌아간 박서보의 단색화를 볼 수 있는 셈이다.
박서보가 2010년 제작한 1000호에 달하는 연보라 묘법을 비롯한 형형색색의 작품들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수신(修身)하듯 풀어낸 연필 묘법과 달리 박서보는 2000년대 들어 풍성하고 매혹적인 색감을 강조한 채색 묘법을 선보였다. 예술이 종잡을 수 없는 사회변화로 지칠 대로 지친 사람들의 영혼을 치유하는 도구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던 그답게 하늘과 바다, 단풍 같은 자연의 색이 담겼다. 최 대표는 “박 화백은 2000년 이후 늘 그림이 치유가 돼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면서 “본인을 드러내지 않는 그림들이 사람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편안하게 해준다”고 말했다.
달맞이점에서 가로 5.5m, 세로 2.5m의 대형 스크린에 상영되는 ‘디지털 묘법’도 재미있다. 강렬한 색감과 입체감 있는 질감을 초고해상도로 확대해 생동감을 부여한 작품으로, 손자이자 미술계 동료였던 박지환 작가가 제작한 작품이다. 지난달 부산을 찾은 후 남긴 소셜미디어에서 작품을 소개하며 “손자 녀석이 만든 영상. 이 값비싸게 구는 놈과 같이 내려오니 좋다”며 은근슬쩍 자랑을 남길 만큼 만족한 작품이란 설명이다. 전시는 12월 3일까지.
유승목 기자 mok@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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