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저우 아시안게임이 남긴 9개의 별
모든 선수가 피, 땀, 눈물을 흘린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이 끝났다. 한국 선수단은 총 190개 메달(금42, 은59, 동89)을 획득, 눈부신 경기력을 선보이며 종합 메달 순위 2위를 기록했다. 중요한 것은 메달 색만은 아니다.
한국 수영 르네상스 황선우 김우민 이호준 양재훈
항저우에서 금빛 물보라가 몰아쳤다. 황선우(20), 김우민(22), 이호준(22), 양재훈(25)으로 구성된 '드림팀’은 남자 계영 800m 결승에서 7분01초73을 기록해 아시아 신기록을 작성했다. 한국 수영 사상 첫 아시안게임 계영 금메달이자, 아시안게임 단체전 첫 금메달 역사를 쓴 것이다.이들은 7월 일본 후쿠오카에서 열린 2023 세계수영선수권대회 남자 계영 800m에서 아시아팀으로는 유일하게 결승에 올라 한국 기록(7분04초07)을 경신해 아시안게임 금메달 기대를 높인 바 있다. 이후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아 한국 기록을 2초34 앞당겼고, 2009 로마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일본이 세운 아시아기록(7분02초26) 역시 13년 만에 0.53초 단축하며 한국 수영의 밝은 미래를 예고했다.
이번 대회에서 황선우는 총 6개, 김우민은 총 4개, 이호준은 총 4개, 양재훈 총 2개 종목에서 메달을 목에 걸었다. 아시아 최강 수영 황금세대의 등장을 알리는 쾌거였다.
금빛 삐약이로 성장한 신동 신유빈
삐약이가 해냈다. 21년 만에 한국 탁구에 금메달을 안긴 신유빈(19, 대한항공)이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여자 복식 금메달, 단식과 여자 단체전, 혼합 복식에서 동메달 3개를 따냈다. 어린 시절 '무한도전’ '스타킹’ 등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탁구 신동’으로 불렸던 신유빈이 '금메달리스트’로 성장한 것이다.메달 앞에서 선보인 당찬 퍼포먼스는 그의 트레이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아시안게임 여자 복식에서 금메달을 딴 뒤 하트를 그리고 화살을 쏘는 세리머니를 펼쳐 국민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임종훈(26, 한국거래소)와 조를 이룬 혼합 복식에서 동메달을 딴 뒤 시상식에서 펼친 세리머니도 화제였다. 둘은 볼하트를 선보였고, 임종훈이 신유빈의 메달 끈을 바로잡아주는 모습에 관중들이 환호를 보냈다. 신유빈은 "경기 전날 우승할 경우를 대비해 미리 생각해 놨다"고 말해 스타성을 뽐내기도 했다.
아시안게임 이후 비건 뷰티 브랜드 '탈리다쿰’의 앰버서더로도 선정되는 등 신유빈의 인기는 날로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신유빈은 귀국 후 일부 일정을 소화한 뒤 2024 파리 올림픽 준비에 매진할 예정이다. 부상악화에 대비하기 위해 월드테이블테니스(WTT) 스타 컨텐더도 기권했다. 귀엽고 깜찍한 '신동 삐약이’에서 스타성과 실력을 고루 갖춘 '금빛 삐약이’로 성장한 신유빈. 파리올림픽에서는 또 얼마나 놀라운 성장을 보여줄지 스포츠 팬들의 기대가 모이고 있다.
악바리 여왕 안세영
무릎과 허벅지 곳곳에 테이핑을 하고도 끝까지 라켓을 놓지 않았던 '배드민턴 여왕’은 기어이 금메달을 따냈다. 안세영(21) 선수는 지난 7일 열린 항저우 아시안게임 여자 단식 결승전에서 2·3게임 내내 오른발을 제대로 내딛지 못했다. 경기 초반부터 시작된 무릎 통증으로 장점인 스피드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 절뚝거리며 경기에 치르는 딸의 경기를 관중석에서 지켜보던 어머니 이현희 씨는 기권을 권유하기도 했다.하지만 안세영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겨냈다. 금메달이 확정된 순간, 쓰러지듯 코트에 드러누운 그의 모습에서 이번 경기가 얼마나 힘겨웠는지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내내 경기를 지켜 본 국민들의 가슴도 함께 뭉클해졌음은 물론이다. 잠시 숨을 고른 안세영은 바로 일어나 명승부를 합작한 천위페이에 악수를 청하며 황제의 품격을 보여줬다. 이어 유니폼 왼쪽 가슴에 새겨진 태극기에 입을 맞춘 뒤 특유의 '포효 세리머니’를 보여줬다. 투혼으로 거머쥔 금메달. 많은 이들이 이번 대회 최고의 장면으로 뽑은 순간이었다.
우상과 함께 뛴 행복한 점퍼 우상혁
고루한 표현이지만, 말 그대로 '새처럼’ 날아올랐다. 우상혁(27)은 10월 4일 중국 항저우 올림픽 스포츠센터 스타디움에서 열린 남자 높이뛰기 결선에서 2m33을 기록했다. 2m35를 넘은 '현역 최강자’ 무타즈 에사 바르심(32·카타르)에 이어 획득한 은메달이다. 우상혁은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 이어 두 대회 연속 은메달을 거뒀다. 아쉬움이 클 법하지만, 우상혁은 "행복하다"며 웃었다. 우상혁은 바르심을 보며 높이뛰기 선수에 대한 꿈을 키웠다. 그는 "오늘 바르심과 최종 높이에서 경쟁해 영광"이라며 "어렸을 때 내가 과연 저 선수(바르심)와 같이 뛰는 위치에 도달할까 싶었는데 이뤄졌다"며 행복해했다.금메달리스트인 바르심은 우상혁과 세계 최고 점퍼를 놓고 다투는 라이벌이다. 해외 언론도 이번 대회에서 우상혁과 바르심의 대결에 주목했다. 세계랭킹 4위 우상혁의 최고 기록은 2m35. 세계선수권 3연패, 2020 도쿄 올림픽 공동 금메달 출신의 현역 세계 점퍼 바르심은 2m43이 최고 기록이다. 하지만 올 시즌 개인 최고 기록만 놓고 보면 우상혁이 2m35, 바르심이 2m36으로 막상막하다.
이번 대회는 끝났지만 우상혁의 눈은 이제 파리를 향해있다. 우상혁은 "파리 올림픽까지 300일도 안 남았다. 차근차근 계단 오르듯 준비해 바르심과 (올해 세계선수권 우승자인) 장 마르코 탬베리 같은 선수들이 나를 무서워하도록 만들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자신의 롤모델과 어느덧 라이벌이 되어 그를 뛰어넘기 위해 훈련하고 있다는 우상혁. 파리 올림픽에서 그는 얼마나 높이 날아오를 수 있을까.
‘오락실 고인물’ 아재의 힘 김관우
날마다 오락실을 들락거리며 어머니에게 혼나던 아이가 40대가 돼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게임만 하던 아들을 혼내던 어머니는 아들의 금메달 소식에 축하 문자를 보냈고, '오락실 고인물’ 아들은 금메달리스트가 되어 눈물을 쏟았다.김관우(44) 선수는 '아재’들의 희망이 됐다. 그는 이번 대회에 처음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e스포츠의 유일한 격투게임 스트리트파이터5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아시안게임 사상 e스포츠 첫 금메달이라는 역사의 주인공이 됐다. 원로 격투 게이머에서 직장인으로 '노장의 힘’을 보여준 그는 36년 동안 격투 게임, 특히 스트리트파이터 시리즈에 전념했다. 김관우는 어린 시절엔 담임 선생님, 부모님께 혼나면서 오락실을 집처럼 드나들었다고. 아무리 혼나도, 모두가 말려도 게임을 놓지 않았던 강한 의지와 승부욕은 결국 그를 아시안게임으로 인도했고, 대한민국에 금메달을 선물했다.
매일 길게는 10시간까지 맹훈련한 독종은 '40대 아재들의 희망’이 된 데 대해 "나이 먹었다고 '이제 그런 거 못 해’라는 말을 하지만 아직 하고 싶으면 할 수 있다"라며 "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도전하시라"고 용기를 건넸다. 그러면서 "젊은 친구보단 시간이 좀 더 걸릴 수 있지만 (그렇기에) 좀 더 하면 된다"고 덧붙였다.
전설의 비보이가 따낸 값진 은메달 김홍열
스포츠와 예술의 혼합물이 무엇인지 톡톡히 보여줬다. 비보이계의 전설로 통하는 김홍열(Hong10·38)이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 신설 종목 브레이킹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가 상대한 나카라이는 2002년생으로 1985년생 김홍열보다 17살이나 어리다. 한참 어린 경쟁상대를 두고도 김홍열은 자신만의 무대를 펼쳐나갔다. 심사위원진에게 딱 한 표만 더 받았다면 승패가 바뀌었을 가능성도 있다.김홍열은 이미 국제무대에서 알 만한 사람은 모두 아는 인물. 그는 16세인 2001년부터 국제대회에 출전해 22년째 정상급 기량을 유지하고 있다. 그가 브레이킹계에서 존경 받는 이유다. 한국 브레이킹의 역사를 여러 차례 새로 쓴 김홍열은 이번 대회를 통해 브레이킹이 스포츠 종목으로서 경쟁력을 보여줬다고 자부했다. 그는 브레이킹의 본질이 '예술성’에 있다고 봤다. 예술과 손잡은 스포츠는 앞으로 어떤 모습일까. 2024 파리 올림픽부터 정식 종목이 되는 브레이킹에서 김홍열 그리고 대한민국 선수들의 무대를 기대해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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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뉴스1 뉴시스
김윤정 프리랜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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