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30주년을 맞아 전시 기획자로 나선 김희선이 한국을 대표하는 아티스트들과의 만남 뒷얘기를 들려주었다.
"드라마 '품위있는 그녀’에서 연기한 우아진이 그림을 굉장히 사랑하는 캐릭터였어요. 대사에 유명한 작가 선생님들의 이름이 나오기에 궁금해서 한분 한분 파다 보니 재미있더라고요. 또 작품을 보면서 힐링이 되기도 하고요. 많은 분과 이런 재미를 공유하기 위해 전시를 기획하게 됐습니다."
2017년 방영된 '품위있는 그녀’는 준재벌가를 배경으로 한 막장 드라마. 욕망에 충실한 여느 캐릭터들과 달리 김희선(46)이 연기한 우아진은 마지막까지 기품을 잃지 않는데, 미술은 이런 그녀의 캐릭터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장치로 쓰였다. 이 작품을 통해 미술 장르에 눈을 뜬 김희선이 아트 콘텐츠 디렉터라는 새로운 타이틀에 도전했다. 소속사 힌지엔터테인먼트와 아트테인먼트 컴퍼니 레이빌리지가 공동 기획한 아트 프로젝트 'ATO; 아름다운 선물展’에 기획자로 참여한 것. 10월 15일까지 서울 여의도 더현대서울 ALT.1 갤러리에서 열린 'ATO; 아름다운 선물展’에서는 세계적 미술품 경매 회사 크리스티에서 주목받는 초상화의 거장 강형구, 50년간 벽돌 회화를 이룩한 극사실주의 화가 김강용, 추상미술의 대가 박서보, 추상 조각의 거장 박석원, 단색화의 거장 이우환, 미디어아트 분야의 세계적 작가로 인정받는 이이남 등 현대미술 거장 6인의 작품 130여 점이 전시됐다.
이번 전시는 김희선이 데뷔 30주년을 맞은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이자 쉼표 같은 이벤트다. 그녀는 인터뷰에서 "우리는 10년, 20년 단위로 기념을 하지 않나. 그동안 쉴 새 없이 달려왔는데, 30주년이 되니까 스스로 기념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은 여유가 생겼다"고 말했다.
거장들의 순수함 통해 인생을 배우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6인의 작가는 한국을 대표하는 어벤저스급 아티스트들이다. 이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건 아무리 유명한 갤러리나 기획자라 해도 쉽지 않은 일이다. 김희선은 "선생님들께 삼고초려를 했다. 다들 좋게 봐주시고 허락해주셨다. 내가 배우 활동을 30년 했으니 열심히 살아온 걸 살짝 인정해주신 거 같다"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드라마 배역이 인연이 돼 호기심으로 그림 공부를 시작한 김희선은 전시 준비에 2년 이상의 시간을 쏟아부었다. 그녀는 그동안 작가들의 작업실을 찾아 작품과 작업 세계에 대해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면서 교감해왔다. 가마쿠라에 작업실을 두고 있는 이우환을 만나기 위해 일본행 비행기에 오르기도 하고, 몇 시간을 달려 광주에서 이이남과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박서보의 제주 아틀리에와 강형구의 서울 압구정 작업실, 박석원의 파주 작업실, 김강용의 양평 작업실도 찾았다.
"이우환 작가님의 작업실에는 선생님이 아주 아끼는 공간이 있는데, 그곳 벽에 선생님이 직접 작품을 그려 넣으셨어요. 그 방의 문을 여는데 온몸에 소름이 돋았죠. 작품을 보여주신 것만 해도 감사한데, 근처 단골 식당에서 저녁도 사주시고 좋은 와인도 내주셔서 정말 감동을 받았어요. 좋은 선생님들과 수다도 떨고 세상 이야기도 하고 그런 게 정말 재미있었고 인생 공부도 됐습니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강형구 작가는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현대 한국 초상화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빈센트 반고흐, 앤디 워홀 등 주로 서양 거장의 초상화를 그려온 그는 이번 전시를 위해 특별히 김희선의 초상을 그렸다. 그가 동양인 여성을 그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강 화백은 "초상화에는 대상의 인품이나 인성이 드러난다. 나는 김희선이라는 사람의 인성을 그린 것이다. (김희선 씨와의 만남을 통해) 그릴 만한 가치와 동기를 느꼈다. 예술을 사랑해서 미술계를 위해 디렉터로 참여해준 게 고맙다"고 인사했다.
전시에 참여한 6인의 아티스트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무엇인지 묻자 김희선은 "작가님들 모두 정말 순수하시다. 그림 외에는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365일, 24시간 작품 생각만 하신다. '이번 작품을 끝내면 뭘 하실 거냐’고 여쭤보면 한결같이 다음 작품 이야기를 하신다. 난 선생님들의 작품에 숟가락만 얹었다. 지금까지 50년 이상 한길만 걸어오신 선생님들을 뵈면서 겸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답했다.
김희선은 6인의 거장을 대중에게 친숙한 영화 속 캐릭터에 비유해 설명하기도 했다. 이우환 선생은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자상하고 따뜻한 로베르토 베니니, 박석원은 '죽은 시인의 사회’의 순수하고 꾸밈없는 영원한 캡틴 로빈 윌리엄스, 깔끔하게 정돈된 김강용은 영화 '인턴’의 로버트 드 니로, 강렬한 에너지를 지닌 강형구는 '위대한 쇼맨’의 휴 잭맨, 동서양과 고금을 넘나드는 작품 세계를 구축한 비디오 아티스트 이이남은 '시네마 천국’의 필립 느와레, 고령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젊고 열정 넘치는 작품을 선보이는 박서보는 '자이언트’의 제임스 딘을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 그녀의 설명이다. 암 투병 중이던 박서보 선생은 전시 종료 하루 전이던 10월 14일 타계했다.
인터뷰를 마치며 김희선은 "본업이 배우인 만큼 전시 기획에 온전히 몰두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앞으로도 연기 외에 좋은 작가님들의 작품을 소개하고 싶다"고 말해 기획자로서의 미래의 행보를 기대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