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 전 살갑게 보듬지 못했던 담임을 용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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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 언저리에 있는 어른들 얼굴과 눈에 지혜가 담겨 있었다. 제자들한테 배워야 할 것이 많다는 것을 새삼 느낀 시간이었다."
"한명 한명 이름을 부르고 싶었는데 울컥해 부를 수 없었다. 가슴으로 이름을 불렀고, 눈빛으로 대답했다." 이들은 꼭 60년 만에 다시 만났다.
"오랜만에 여러분 앞에 서니 잘못한 일만 떠오릅니다. 햇병아리 교사여서 살갑게 보듬어주지 못헀습니다. 여러분께 용서와 이해를 바랍니다." 제자들이 웃으며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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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병아리 교사 잘못한 일만 떠올라”
70살 제자 27명 “좋은 기억만 있어요”
“일흔 언저리에 있는 어른들 얼굴과 눈에 지혜가 담겨 있었다. 제자들한테 배워야 할 것이 많다는 것을 새삼 느낀 시간이었다.”
지난 20일 낮 충북 청주시 강내면의 한 식당에 늙수그레한 손님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일흔을 넘기거나 바라보는 이들은 가슴에 하얀 이름표를 달았다. 이들은 1963년 경북 문경 동로국민학교 2학년 2반 학생 27명이다. 뿔테 안경을 쓴 이가 들어서자 일제히 ‘선생님’하고 몰려들었다. 노재전(79) 학교법인 형석학원 사무국장이다. 노 국장은 당시 이들의 담임 교사였다.
“한명 한명 이름을 부르고 싶었는데 울컥해 부를 수 없었다. 가슴으로 이름을 불렀고, 눈빛으로 대답했다.” 이들은 꼭 60년 만에 다시 만났다. 노 국장은 그해 청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첫 부임한 산골학교에서 이 제자들을 만나 한 해를 보냈다. 노 국장은 지난 5월 스승의 날을 맞아 자신의 60년 교육 여정을 담은 책 ‘배움의 길이 날 가르쳤네’(도서출판 직지)를 냈다. 이 책을 한 제자가 보고 수소문 끝에 노 국장에게 연락해 만남이 이뤄졌다.
스승은 용서를 먼저 청했다. “오랜만에 여러분 앞에 서니 잘못한 일만 떠오릅니다. 햇병아리 교사여서 살갑게 보듬어주지 못헀습니다. 여러분께 용서와 이해를 바랍니다.” 제자들이 웃으며 답했다. “별말씀을요. 우린 나쁜 기억은 없고 좋은 일만 떠오릅니다.”
60년 세월을 허무는 데는 십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스승과 제자는 이내 60년 전으로 시간 여행을 함께 떠났다. “책 잘 읽는다는 선생님 칭찬 덕에 지금도 책을 즐겨 읽어요.” “방귀 참은 노랑각시 이야기는 지금도 웃겨요.” “지각 안 하려고 달렸는데 달리기 선수로 뽑혔어요.” 보릿고개 때 학교에서 준 강냉이죽을 먹던 일, 교실 난롯불을 지피다 기침을 콜록이던 일 등 추억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60년 세월은 코흘리개였던 아이들을 농사꾼, 스님, 교육자, 사업가, 주부 등 다양한 모습으로 빚었다. 하지만 대여섯은 이미 세상을 등졌다는 말에 모두가 숙연해지기도 했다. 제자들은 내년 봄 더 많은 벗과 옛 학교에서 다시 만나자는 말을 스승에게 건네고, 서울·포항·대구·문경·서산·용인·포천 등으로 돌아갔다. 스승은 저녁 내내 이어진 ‘잘 도착했다’는 메시지에 가슴·눈가가 뜨끈해졌다.
“‘교권 추락’ ‘교육 붕괴’ 등이 거론되는 혼란한 시기여서 더 훈훈했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내 생애 가장 기쁘고, 행복하면서도 많이 배운 날이었다.”
오윤주 기자 st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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