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 비치코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모든 희생자 고통에 공감"[문화人터뷰]
러시아 태생 지휘자…우크라이나 침공에 비판
[서울=뉴시스] 강진아 기자 = "저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모든 희생자들의 고통에 똑같이 공감합니다."
동유럽 대표 악단으로 꼽히는 체코 필하모닉을 이끌고 내한한 지휘자 세묜 비치코프(71)가 '침묵'을 깼다.
지난해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당시 클래식계에서 앞장서서 비판의 목소리를 강하게 냈던 그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전쟁으로 인한 무고한 희생에 안타까워하며 그는 무겁게 입을 뗐다.
지난 23일 서울 강남구 파르나스호텔 클럽 라운지에서 만난 비치코프는 "저는 이 전쟁에 대해선 침묵으로 입장을 표현해왔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지금 당면한 현실에 말을 하기 어려운 건 양측의 감정이 너무 격앙돼 있기 때문"이라며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가져야 할 중요한 건 다른 사람에 대한 연민과 공감이다. 수 세기 역사 속에 불의와 폭력, 억압, 절망의 경험에 대한 감정은 똑같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2주 전에 하마스가 저지른 행위는 분명한 테러리즘이다. 무장한 군인들이 무고한 시민들을 무차별 사살했다. 이는 동물들도 하지 않는 행동이다. 또 협상 기회를 노리기 위해 인질들을 잡았는데, 겁쟁이들만 하는 행위"라며 "이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고 해결돼야 한다"고 비판했다.
전쟁 반대 목소리를 내온 그는 러시아에서 태어난 유대인으로 전쟁에 대한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할아버지는 전쟁에 나가 돌아오지 못했고, 우크라이나 오데사에 살던 외가는 나치에 의해 몰살당했다. 아버지는 전쟁에 참전해 두 번이나 부상을 입었고, 어머니는 나치의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 900일간의 포위전에서 살아남았다. 그가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대규모 학살"이라고 강도 높게 목소리를 높인 이유다.
전날 프랑스 파리에서 서울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곱씹었던 생각도 꺼냈다. 기내 화면을 통해 현 위치를 보여주는 지도를 문득 바라본 때였다.
"흑해 위를 지날 때였어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분쟁지역인 크림반도 남서부 도시인) 세바스토폴이 있었고 반대쪽엔 튀르키예가 있었죠. 그리곤 아내에게 문자를 보냈어요. '비행기 안은 이토록 평화로운데 저 아래는 극악무도한 폭력이 가득하다. 우리는 참 특권을 가진 사람들이다.' 반면 그렇지 못한 이들을 생각했죠. '왜 그들은 더 이상 흘릴 눈물도 없는 상태로 살아가야 하는가.'"
그러면서 "2주 전에 일어난 일과 그동안의 긴 역사는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며 "저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각각 '두 개의 국가'로 존재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 해결될 수가 없다"고 밝혔다.
일흔이 넘은 거장의 내한은 이번이 처음이다. 23살에 미국으로 이주해 뉴욕 매네스 음대를 졸업한 그는 1985년 베를린 필하모닉 지휘로 데뷔했다.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 명예 지휘자 등 38년간 세계 유수 오케스트라와 호흡을 맞춰왔다. 그동안 중국, 일본, 대만, 호주 등을 수차례 다녀갔지만 한국과는 인연이 닿지 않았다.
그는 "한국 관객들이 어떨지 너무 궁금하고 흥분된다"며 "비록 그동안 한국에 올 기회는 없었지만 많은 한국 음악가들의 음악을 듣고 만나보며 매우 흥미롭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4월 유럽 투어에서 피아니스트 조성진과도 협연했다.
유럽에서 명성이 높은 그의 첫 내한 소식에 한국 클래식 팬들의 기대감도 높다. 그는 "(한국 관객들의 반응을) 전혀 몰랐지만 감동적이다. 건강 상태는 아주 좋다"고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
24일 예술의전당 무대에선 체코 필하모닉의 정체성을 온전히 담아낸다. 체코 필하모닉은 1991년 첫 내한 이후 다섯 번의 공연에서 체코 대표 작곡가인 드보르자크와 말러, 스메타나의 작품을 선보여 왔다.
이번엔 '사육제 서곡', '교향곡 7번' 등 드보르자크 작품만으로 꾸민다. 드보르자크는 올해 설립 127주년을 맞이한 체코 필하모닉의 1896년 1월4일 첫 연주회의 지휘자였다. 그는 "드보르자크의 음악은 독특하고 개성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2018년부터 체코 필하모닉 상임지휘자를 맡아 온화한 리더십을 발휘해 온 비치코프는 악단 내 '대디'로 불린다. 2017년 오랜 지휘자였던 벨로홀라베크가 타계하고 슬픔에 빠져있던 단원들은 비치코프가 이끈 공연에 감동해 무대 뒤로 몰려가 그에게 "대디가 되어달라"고 요청했다는 일화다. 그는 "당시 악장이 제게 최고의 음악을 끌어내달라고 부탁했다. 제가 124명의 고아를 놔두고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냐"고 웃었다.
"대디니까 당연히 단원들의 모든 것에 관심을 갖죠. 지휘자로 단원들에게 제가 원하는 음악에 대해 제스처와 신호를 보내고, 그들은 음악으로 답변해요. 제가 요구한 것보다 훨씬 더 나은 소리가 나온다면 제가 바뀌어야죠. 음악은 언어에요. 우리가 하는 말처럼 음악 역시 말을 하죠."
다음을 확약할 순 없지만, 이번 내한을 계기로 꼭 다시 한국에 오고 싶다는 비치코프. 그는 "제가 한국 음악을 지휘할 것인지 궁금하지 않냐"고 너스레도 떨며 "사실 한국어를 모르기 때문에 관광객으로 음악을 연주할 순 없다"고 웃었다.
"음악이 세상을 바꿀 순 없어요. 하지만 훌륭한 음악은 그걸 듣는 순간 우리의 내면에서 작용하죠. 연주회가 끝나고 난 후에도 마음을 움직이는 그 순간이 이어졌으면 합니다."
☞공감언론 뉴시스 akang@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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