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참사가 제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아요” [이태원 참사 1주기]
10월 이태원에는 소슬한 가을바람이 무색할 만큼 나풀거리고 반짝이는 것들이 가득하곤 했다. 이제 이곳에는 흰 국화 송이를 들고 다니는 청년들이 익숙한 풍경이 됐다. 10월29일은 이태원 참사 1주기다. ‘벌써’라는 부사가 먹먹한 이들을 만났다. 이들은 1년 전 ‘그날’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다시 산다. 그 탓에 지난 1년을 마치 10년처럼 산 것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들은 마음의 조각 옆에 여전히 희망의 자리를 비워두고 있었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박가영씨의 어머니 최선미씨, 생존자 김초롱씨, 상인 남인석씨와 경찰관 윤하성씨(가명)를 만났다. 1년간 네 사람은 닮은 듯 다르게 각자의 위태로움을 지나왔다. 하지만 그 시간을 거쳐 도달한 주장은 같았다. 추상적인 위로 말고 구체적인 사과를 하라는 것. 지난 1년간 이들은 절대 흔들리지 않을 명징한 사실을 배웠다.

요즘 김초롱씨는 중고 거래 앱을 뒤적이며 많은 시간을 보낸다. ‘두 시간만 편의점 봐주실 분’ ‘쇼핑몰 의류 촬영하는 네 시간 동안 다림질 해주실 분’ 등. 짧은 시간이지만 낯선 일을 하며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힘이 된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 활기차게 떠들고 식사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그를 안심시킨다.
김초롱씨는 10·29 이태원 참사 현장에 있었던 생존자다. 참사 이후 잠자고, 먹고, 씻고, 일하는 평범한 일상이 무너졌다. 처음에는 죄책감으로, 어느 순간에는 외로움으로, 끝내는 죽음을 향한 충동으로 그의 1년은 롤러코스터를 탔다. 자신의 상담 기록을 토대로 쓴 ‘선생님 제가 참사 생존자인가요?’라는 제목의 글을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리고 언론사에 보내 연재했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 자신 같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시작한 작업이었다.
그는 자신이 ‘생존자’라고 불리는 것이 맞는지 여전히 헷갈린다며 글 제목이 ‘마침표’가 아니라 ‘물음표’로 끝나는 의미를 살펴봐달라고 말했다. 생존자라는 단어의 무게에 매여 오랫동안 ‘그날의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동안 불안과 공황으로 버스를 타지 못했던 그는 추운 겨울에도 늘 걸어 다녔다. 버스를 탈 수 있게 된 이후에는 ‘77XX번 버스의 미친 여자’라고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매일 퇴근길 버스에서 울음을 터트렸다. 그런 그의 아픈 시간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동네 어귀에서 한결 가벼워진 그를 만났다. 참사 1주기를 앞둔 10월16일, 그의 연재 글을 엮은 책 〈제가 참사 생존자인가요〉가 출간된 날이었다.
이태원 참사 생존자의 첫 책이다.
기대나 기쁨은 별로 없다. 비난받고 매장당할 수도 있다고 느끼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원고를 탈고한 지난 추석 연휴에는 이민 갈 곳을 계속 찾아봤다.
왜 비난받을 거라 생각했나.
글을 연재했을 때 반응이 그랬다. 이해 못하는 사람들은 어떤 말을 해도 절대 이해하지 못하더라. 피해자들을 찾아다니면서 괴롭히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들 안의 미운 감정을 남에게 쏟아내는 사람들이다.
곧 1주기인데.
담담하게 10월을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난 1년이 너무나 힘들었고 그런 시간들을 견뎌 지금에 이르렀으니까 괜찮을 거라고. 그런데 10월이 되니까 몸이 반응하더라. 악몽도 많이 꾸고 심장이 두근두근 뛴다. 누가 자꾸 뒷덜미를 잡고 끌어다 과거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 같다. ‘또, 또, 또, 반복이구나’ 이런 느낌. 당당하게 올해 핼러윈에도 이태원에 갈 거라고 말했는데 못 갈 것 같다. 내가 강한 사람이라고 자꾸 착각한다.

생존자로서 마음의 부담이 큰 것 같다.
언론 인터뷰 요청이 많은데 ‘이태원 참사 현장에 가서 어떤 트라우마를 겪었는지 말해달라’는 종류다. 나는 이태원과 10·29 참사는 분리해서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이태원에 가서 ‘생존자’로서의 힘든 모습을 보여달라고 하는 게 부담스럽다. 사실 생존자라는 단어가 내게 맞는지도 잘 모르겠다.
‘생존자’가 아니다?
그렇게 확신할 수가 없어서 제목에도 물음표를 넣었다. 나처럼 현장에 있다가 살아남은 사람을 설명할 단어가 없으니까 생존자라는 단어를 쓰긴 했지만 사실 이 단어로 불리는 순간 엄청난 압박감이 든다. 다른 생존자들이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유도 비슷할 것 같다. ‘생존자’라고 호명되면 계속 생존자의 역할로 살아야만 할 것 같다. ‘생존자니까’라면서 내 앞에 자신들이 기대하는 걸 갖다 놓는 것 같다고 할까. 차라리 ‘당사자’라는 단어는 어떨까. 그럼 조금 더 자유롭게 생각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당사자’를 만나 경험을 나누기도 하나?
마음은 만나고 싶지만 아직은 안 되더라. 그분들이 잘 지내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하지만 직접 그들을 마주하진 못하겠다. 나도 이러는 게 좀 괴로운데… 나는 몸을 다치지 않아서 부채감 같은, 미안한 마음이 있다.
일종의 죄책감일까?
아니다. 처음에는 참사 현장에 있었으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랐던 둔감함, 도와주지 못하고 황급히 자리를 피해 나왔던 수치심, 이런 감정들 때문에 나 자신이 너무 징그러웠다. 죄책감을 넘어 자기비하로 치달았다. 상담을 받고 관점을 바꾸려고 노력했다. 지금은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는 점은 명확히 안다. 하지만 단순히 운으로 살아남은 거니까 당시 사람들의 죽음과 내가 연관되어 있다고 느낀다. 내가 그들의 운을 조금 더 가져와서 살았다는 빚진 마음. 지금의 감정은 죄책감보다는, 그곳에 있었던 모두가 다 연결되어 있었다는 연대감에 가깝다. 그래서 절대 잊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상담을 많이 받았다고 들었다.
상담을 받으면 힘이 난다. 계속 잘해나갈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생긴다. 그런데 문을 열고 세상에 나오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더라. 조금 치유받고 더 많이 상처받는 시간이 반복됐다. 사회가 나를 위로해줄 필요는 없지만 참사에 대해 제대로 논의라도 해야 하는데 그것마저 안 되니까 계속 제자리로 돌아왔다. 나아지려고 뭘 해봐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느낌에 언제인가부터 죽음이 계속 떠오르기도 했다.
참사 이후 2차 가해 등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도 있었다.
타격이 컸다. 근데 그 마음이 너무 이해가 됐다. 우리는 이렇게 아픈데 이 세상은 사과하지 않기 위해 공격만 하더라. “나라 구하다 죽었느냐(김미나 국민의힘 창원시의원).” “참사 영업 하려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김상훈 국민의힘 의원).” 정치인들이 이런 말을 하는 걸 들으면서 ‘아, 이 세상에서는 내가 이상한 사람이구나. 다른 세상으로 건너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사 때문이 아니라 이해받지 못한다는 단절감이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하게 만드는 거다. 내게도 가장 위험한 순간이었다.
알코올에 의존하던 시기도 있었다고.
술을 마시면 순간적으로 현실을 잊을 수 있으니까 혼자 밤새 술 마시고, 울고, 술 마시고… 그러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내가 누운 채 구토를 해서 이불이며 옷이며 얼굴, 머리가 엉망이었다. 바닥에 라면이 뿌려져 있고 코피가 분수처럼 터졌다. 병원에 들렀다 급하게 상담 선생님에게 찾아가겠다고 연락하고 나섰는데, 평소 익숙한 길인데도 도무지 길을 못 찾겠더라.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겨우 상담소를 찾아갔다. 이 과정에 있었던 일은 나를 아끼는 분들이 알면 너무 괴롭고 슬플 것 같아서 그간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다. 처음으로 책을 통해 고백했다. 이태원 참사 같은 고통이 찾아오면 한 개인이 이렇게도 무너질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는 마음으로 썼다.

그간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 공청회나 100일 국회 추모제 등에 참석해 목소리를 내왔다.
뭔가 달라질 거라고 믿었던 게 순진한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회의주의에 빠지자는 얘긴 아니다. 현실은 쉽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무언가를 계속하는 건 의미 있다고 본다. 국회 추모제 때는 발언문을 준비해서 그걸 읽는 척했지만, 사실 그날 정치인들을 보면서 내 마음에 떠오른 말들을 즉석에서 한 거다. 그래서 ‘용기를 낸 대가가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것을 목격하는 것뿐이라면 다시는 용기를 내지 못할 것 같다’라는 말이 나온 거였다. 그날 내가 너무 힘들어 보였는지 끝나고 유가족 한 분이 오셔서 말을 건네기도 했다.
무슨 말을 나눴나?
“초롱씨가 다 잊고 요즘 젊은 사람들 사는 것처럼 행복하게 살아주면 좋겠다”고, “진상규명도 우리가 할 일이니까 신경 쓰지 말고, 울지 말고 씩씩하게 살아달라”고. 근데 그 말이 나를 옥죄고 있던 무언가를 툭 잘라내주는 느낌이었다. 나한테 용돈까지 주려고 하는 분도 계셨다(웃음). 그렇게 해주신 말씀이 나를 정말 자유롭게 해줬다. 좀 더 내 방식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보자는 마음을 갖게 됐다.
이태원 참사를 시민들이 계속 말하고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
기억하려고 애써 노력하지 않으면 진짜 쉽게 지워진다. 그러면 반복된다. 미래 세대들은 이런 일을 겪지 않아야 하고, 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는 이런 실수를 반복하면 안 되지 않나. 많이들 착각하는 것이 특별법을 제정하고 진상규명하자는 게 어른들을 위해서 투쟁하는 건 줄 안다. 아니다. 청년들과 어린이들을 위해서 하는 일이다. 이 일을 지우고 잊어서 이득을 얻는 건 어른들밖에 없다. 계속해서 기억해야 청년들과 어린이들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
“이태원과 핼러윈은 잘못이 없다”라고도 말해왔다.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생존자분이 이런 말을 해주셨다. ‘그때 나에게 왜 백화점에 갔냐는 사람은 없었다’고. 이게 무슨 말일까? 2017년 이태원 핼러윈 축제 때 참여자가 20만명 정도 됐다. 참사 당일엔 10만명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내가 2017년에 참사가 발생한 바로 그 사고지점에서 사진을 찍었더라. 사진 속 모두 편안하고 즐거워 보였다. 우리는 늘 그래왔듯 지난해에도 그곳을 갔던 것뿐이다. 놀다가 죽은 게 아니라, 일상을 살다가 죽은 거다. 정말 좋은 어른들이 청년들에게 놀아도 된다고 말해줬으면 좋겠다. 청년들의 문화나 공간을 비난만 할 게 아니라 핼러윈을, 이태원을 더 안전하게 만들어줬으면 한다.
큰 슬픔을 겪는 이웃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 실제 어떤 도움이 힘이 됐나?
구체적인 것들이 도움이 됐다. ‘밥 챙겨 먹어’라는 말보다 실제로 밥을 시켜주거나, 집에 와서 같이 밥을 먹어주는 게 힘이 되더라. 한 언니가 속옷부터 수건, 티셔츠까지 다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을 꺼내서 깨끗하게 다려보라고 조언해줬다. 지금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제품이 된 다리미도 선물해줬다. 실제로 그렇게 다림질을 해보니 자신을 돌본다는 감각이 나를 일으켜 세우는 데 도움이 됐다. 조금씩 잠을 잘 수 있게 된 것도 그즈음부터였다.
요즘은 어떤 일로 힘을 얻나?
중고 거래 앱에 들어가서 사람들 사는 모습을 구경한다. 단기간 알바가 올라오면 직접 해보기도 하고. 열심히 일하고, 밥 잘 먹고, 목표를 향해 가는 사람들을 보는 게 위로가 된다.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것들을 잃어버린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어서 일상을 회복해서 참사 희생자들을 위해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계속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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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다은 기자 midnightblu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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