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초연 ‘트럼펫 협주곡’과 브람스 교향곡 1번 모두 빛났다… ‘음악적 동지’들의 힘 덕분

이강은 2023. 10. 24.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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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회 서울국제음악제(SIMF·심프) 폐막 공연서 바실리 페트렌코와 심프오케스트라 환상적 호흡
브람스의 ‘비극적 서곡’과 교향곡 1번 인상적으로 들려줘
류재준의 ‘트럼펫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세계 초연도 큰 호평
백주영·김민지·김상진·김홍박·최인혁 등 ‘앙상블 오푸스’ 중심의 심프오케스트라 연주력 재확인

‘낭만에 관하여’를 주제로 지난 7일부터 시작한 제15회 서울국제음악제(SIMF·심프) 폐막 음악회가 열린 14일 오후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폐막 무대를 장식할 ‘심프오케스트라’ 단원들과 지휘자 바실리 페트렌코(47)가 들어서자 갈채가 쏟아졌다. 19세기 낭만시대의 거장 브람스(1833∼1897)의 음악세계를 중심으로 올해 서울국제음악제가 차린 다채로운 음악의 진미를 맛본 관객들의 기대감이 깃든 환호와 박수였다. 서울국제음악제는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2023 서울국제음악제(SIMF·심프) 폐막 음악회에서 지휘자 바실리 페트렌코와 심프오케스트라가 공연에 집중하고 있다. 서울국제음악제 제공
영국 로열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페트렌코와 ‘앙상블 오푸스’ 멤버인 백주영(바이올린)·송지원(〃)·김상진(비올라)·이한나(〃)·김민지(첼로)·심준호(〃)·박정호(더블베이스)·김홍박(호른)·최인혁(트럼펫), 한문경(마림바 등 타악기) 등 뛰어난 연주자들이 포진한 심프오케스트라가 마지막 만찬으로 내놓은 코스요리가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전채요리 격인 브람스의 ‘비극적 서곡’은 곧장 입맛을 돌게 할 만큼 풍미가 가득했다. 어둡고 쓸쓸하다가도 격정적인 소리가 소용돌이치며 색다른 감흥을 불러 일으켰다. 큰 키의 페트렌코는 과하지 않으면서도 절도 있고 유연한 지휘로 각 악기가 어떤 모양과 속도로 음을 내야 하는지 조율했다.           

2023 서울국제음악제 오케스트라 지휘를 맡은 바실리 페트렌코가 단원들과 연습하는 모습. 
‘비극적 서곡’으로 예열을 마친 심프오케스트라는 관객들이 궁금해할 만한 새 메뉴를 선보였다. 축제 예술감독인 작곡가 류재준(53)의 ‘트럼펫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을 세계 초연한 것이다. 협연자는 헝가리 출신 트럼펫터 가보르 볼도츠키.

세계 초연이라 어떤 곡인지 가늠할 수 없는 데다 트럼펫터가 지휘자 옆에 서는 건 흔치 않은 장면이라 관객들은 숨죽이며 귀를 쫑긋 세웠다. 혼자서도 힘찬 소리를 늠름하게 뿜어내는 트럼펫이 관현악의 단독 파트너로 과연 잘 어울릴지 호기심어린 기류가 감돌았다.  

트럼펫터 가보르 볼도츠키.   
‘빠르되 활기차게’.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합창석 뒤로 1악장의 시작을 알리는 지시어가 뜨자 바이올린과 클라리넷 선율이 한데 어우러져 비극적인 분위기를 그려나갔다. 그렇게 절망이 차오를 때쯤 트럼펫이 희망을 들이붓는 듯 존재감을 알렸다. 이어 뒤에 좀 떨어져 있던 하프가 살며시 손을 내밀며 트럼펫과 아름답고 행복한 왈츠를 추기 시작했다. 그러다 다시 현악기가 먹구름을 몰고 오고 그 기세에 하프도 침묵하자 트럼펫이 화려한 카덴차(악곡이나 악장 종료 직전에 연주자 홀로 기교적으로 연주하는 부분)로 분위기를 바꿨다. 곧장 행진곡 풍의 리듬과 함께 2악장으로 넘어갔다. 2악장에서도 절망과 희망, 슬픔과 기쁨의 대비가 극적으로 오갔다. 하지만 짝꿍과 같은 하프와 트럼펫의 하모니에 3악장은 밝고 들뜬 표정으로 바통을 이어받자마자 내달렸다. 
지난 14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작곡가 류재준의 ‘트럼펫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 세계 초연이 끝난 후 류재준(앞줄 왼쪽)과 협연자로 나선 트럼펫터 가보르 볼도츠키가 손을 맞잡은 채 관객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서울국제음악제 제공
모든 악기가 하프에 템포를 맞춰 왈츠를 연주하면서 한껏 달아 올랐다. 절정을 향해 마지막으로 내달린 오케스트라가 숨을 고르자 목가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세계 초연이란 부담 속에서도 환상적인 호흡을 보여준 볼도츠키와 심프오케스트라의 협연이 빛난 무대였다. 트럼펫 협주곡은 서울국제음악제가 내세운 ‘낭만에 관하여’와 잘 어우러졌다. 관객들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우레와 같은 박수로 화답했다. ‘실험적인 현대음악이라 듣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한 관객이 있었다면 낭만주의 음악이나 세련된 영화 음악처럼 들려 놀랐을 수도 있다. 평소 연주자가 연주하고 싶어하고, 청중이 듣고 싶어하는 음악을 만들려고 애쓴다는 작곡가 류재준의 작품다웠다. 국내외에서 자주 연주됐으면 하는 바람이 절로 들었다. 
023 서울국제음악제 오케스트라의 악장 백주영.
축제의 마지막 성찬은 심프오케스트라 버전의 브람스 교향곡 1번이었다. 페트렌코는 서울국제음악제에서만 볼 수 있는 심프오케스트라의 강점을 제대로 살렸다. 먼저 같은 장소에서 에드워드 가드너의 런던필하모닉(10월 7일)과 파보 예르비의 취리히 톤할레(10월 13일)가 연주한 브람스 교향곡 1번에 견줘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 낫다는 반응도 적지 않았다. 이는 작곡가 류재준 주도로 2009년 서울국제음악제가 닻을 올리고 이듬해 창단한 ‘앙상블 오푸스’ 멤버가 심프오케스트라의 주축인 것과 무관치 않다. 백주영·김민지·김상진·김홍박·최인혁 등 오랜 음악적 동지이자 기량이 출중한 앙상블 오푸스의 핵심들이 단원 선발과 연주력을 책임지는 만큼 악단 자체의 역량이 수준급일 수밖에 없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악장 백주영의 바이올린 독주는 서늘하다가도 애잔하게 듣는 이의 감성을 헤집는 등 최고의 연주로 손색없었다.   

관객들은 포만감을 느꼈지만 페트렌코와 심프오케스트라가 내놓은 디저트(브람스 ‘헝가리 무곡 6번)에 곧장 자리를 뜨지 못했다. 앞서 볼도츠키가 앙코르 곡으로 준비한 전통 한식 디저트(민요 ‘울산아리랑’)와는 또다른 훌륭한 맛이었다.  

이강은 선임기자 ke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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