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머니룩이라는 징후[오늘을 생각한다]

2023. 10. 24. 0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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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여름 유행은 올드머니룩이었다. ‘올드머니(Old Money)’와 ‘룩(Look)’이 조합된 이 말은 속된 말로 하면 ‘찐 부자 패션’이라 할 수 있다. 흔히 값비싼 ‘뉴머니룩’ 패션 상품은 단순히 원단 질이 우수한 것을 넘어 로고를 크게 강조해 “나 부자야” 하고 뽐낼 수 있도록 설계돼 있는데, 올드머니룩은 명품 로고를 감추고, 최대한 클래식한 스타일로 디자인하는 게 특징이다.

신흥 부자들이 막 거둬들인 부를 과시하기 위해 명품 로고를 드러내는 룩을 고수한다면, 대를 이은 부자들은 소재와 착장으로 ‘고급스러움’을 뽐낸다는 것이 패션업계의 설명이다. 제국주의 국가의 귀족과 자본가들이 즐기는 골프나 승마가 올드머니룩이 추구하는 분위기라 한다. 저렴한 패스트패션 브랜드만 입는 입장에서 이런 이야기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명백히 응시해야 할 우리 사회의 풍경이기도 하다는 점만은 부정할 수 없다.



한데 명품 소비에 대한 서구사회의 설명은 한국사회에선 통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모건스탠리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인의 명품 소비액은 약 21조원으로, 전년 대비 24%나 증가했다. 1인당 소비액으로 따지면 미국 265달러(약 36만원)보다 많은 325달러(약 44만원) 수준이다. 대다수 소비자 월급의 몇 배에 달하는 상품들이 팔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한국의 ‘뉴머니룩’은 “나 부자야”라고 뽐내는 게 아니라 어디 가서 기죽고 싶지 않은 안간힘에 가깝다. 금수저와 자본가들이야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명품 소비를 했건 하지 않았건 평범한 사람이라면 누구도 이런 감정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소셜미디어에는 명품 패션에 대한 온갖 포스트가 넘쳐난다. 이른바 ‘인플루언서’들은 패션 상품 포스팅을 통해 높은 광고비를 받고, 거기서 영향을 받는 팔로워들은 많은 ‘뽐내기’ 콘텐츠를 보며 인정욕구와 경멸이라는 감정 사이를 오르내린다. 우리는 ‘핫템’을 갖지 않으면 세상에서 동떨어진 것만 같은 압박감을 느끼고, 일시적인 과시를 통해 경쟁사회에서 뒤처지지 않으려 애쓴다.

패션심리학자 샤카일라 포브스 벨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신이 부자가 될 가능성이 적다고 느낄 때 명품을 더 많이 검색한다”고 한다. 이를 한국에 대입해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3개국 중 ‘삶의 만족도’ 32위라는 지표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야근과 하우스푸어로 상징되는 일상은 불만족스럽지만, 역설적으로 이를 망각하기 위한 노력이 명품 소비를 통해 이뤄지는 것이다.

올드머니룩 유행은 “진정한 부자들은 부를 티내지 않는다”는 관념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명품 소비 현상의 변곡점을 가리키는 듯하다. 티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과시 소비에서 벗어나도 될 빌미를 주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린 흉내내는 일에 너무 지쳐버린 것 아닐까?

홍명교 플랫폼C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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