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동네병원의 '원팀 의료'… 의사·간호사·영양사·복지사가 '고당환자' 맞춤관리
매사추세츠, 고령화에 의료비 지출 효율화 추구
질병 치료 넘어 식단·주거 등 총체적 건강 관리
"한국도 만성질환 관리 '환자 중심' 체계 필요"
의사가 '이제 맥도날드 그만 드세요'라고 한다고 환자가 즉시 발길을 끊을까요? 패스트푸드를 먹을 수밖에 없는 환경인지, 그렇다면 무엇을 개선해 주는 게 좋을지 따져봐야 건강해질 수 있죠.
컬스틴 메이싱어 하버드의대 일차의료센터 교수 겸 케임브리지헬스연합 가정의학센터 의료책임자
지난 4일(현지시간) 찾아간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케임브리지헬스연합(CHA·Cambridge Health Alliance)'.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곳은 '일차의료(Primary care)' 수납 창구였다. 일반·응급 환자 창구와는 다른 별도의 일차의료 창구가 여러 개 있고, 이들을 돌보는 '일차의료 진료실'이 15개나 됐다.
일차의료는 우리로 치면 동네 병·의원급에서 감기·장염과 같은 경증질환과 고혈압·당뇨 환자 등 일명 '고당환자'로 불리는 만성질환을 관리하는 의료체계다. CHA는 단순한 동네 병원을 넘어 특별한 의료 연대를 발휘한다. 지역 내 일반의, 전문의, 응급의 등이 의료 접근성이 낮은 취약계층을 돌보기 위해 파트타임(일부는 풀타임)으로 근무하면서 연간 13만 명의 환자를 돌본다. 간호사와 PA(Physician Assistant, 미국은 PA가 합법), 간호조무사, 물리치료사 등 의료진은 물론 영양사, 사회복지사 등이 팀을 이뤄 환자를 관리하는데, 질병 치료를 넘어 환자 건강과 관련된 것이라면 뭐든지 챙긴다.
예를 들어 환자의 건강이 안 좋은 이유가 패스트푸드를 너무 많이 먹는 탓이라면, 형편이 넉넉하지 못해 싼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는 건 아닌지 확인한다. 만약 그렇다면 복지사와 영양사가 나서 환자의 식단을 관리하며 고른 영양 섭취를 돕는다. 한국처럼 약만 처방해 주고 끝나는 '1분 진료'에선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다. CHA의 가정의학센터 의료책임자인 컬스틴 메이싱어 하버드의대 일차의료센터 교수는 "지역사회와 시민의 건강과 삶의질을 높이려면 이를 관리할 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경증 환자 몰리는 한국 대형병원, 질병 예방해야 개선
CHA만의 독특한 시스템은 아니다. 매사추세츠주 전역의 동네 병·의원이 이처럼 환자 관리에 공을 들인다. 이는 정부가 최근 '의대 정원 증원'과 '국립대병원 지역의료 거점화' 정책을 발표하고 의료체계 개편에 나서고 있는 우리 상황에 시사하는 바가 많다.
한국에서는 환자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서울 빅5 병원(서울대 세브란스 삼성서울 서울성모 서울아산)으로 불리는 상급종합병원을 자주 찾는다. 감기여도 유명 대학교수에게 진료받고 간단한 수술인데도 무조건 입원한다. 대형병원 병상이 늘 차있으니 위급한 환자는 '응급실 뺑뺑이'를 돌아야 한다. 지역 병원에서 진료받아도 되는 환자들이 수도권으로 몰리니 의사들도 몸값을 올려 수도권으로 올라오면서 지역의료의 공백 상태가 심화하고 있다.
지역의료를 살리기 위한 정부 정책이 성공을 거두려면 환자들이 지역에서 진료받도록 유도해야 하고, 이를 위해 늘어나는 의사들이 지역에 머물며 환자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게 지원해야 한다.
CHA와 더불어 미국에서 손꼽히는 의료기관인 '매사추세츠브링엄종합병원(MGB)'의 '필리스 젠 센터'도 벤치마킹 모델이 될 수 있다. 젠 센터는 만성질환·경증 환자를 관리하는 시설로, 환자가 위중한 경우 MGB에 즉시 이송·협진을 요청할 수 있다. 젠 센터는 대형 의료재단 소속이라는 이점을 이용해 환자의 식단 관리는 물론 주거 취약계층에 적절한 주거지도 찾아준다. 제대로 휴식할 수 있는 주거 공간이 확보돼야 환자 건강도 회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환자 건강지표 보며 수당 지급, 새 실험 나선 매사추세츠
미국을 포함한 주요국들이 만성질환·경증 환자 관리에 힘쓰는 건 인구 고령화라는 거대한 의료체계 위기에 대비하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아픈 노인이 빠르게 늘어나면서 의료비 지출도 급속히 늘고 있다. 그런데 고령층의 대표적 만성질환인 당뇨병은 관리만 잘해주면 큰 불편 없이 일상생활이 가능하다. 대신 복약 시간을 놓치고 혈당을 높이는 음식을 섭취하면 병을 키워 합병증을 부르게 된다. 최악의 경우 실명하거나 팔다리를 절단해야 한다. 합병증으로 가기 전에 미리 관리해 주는 게 의료비와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길이다. 데이비드 드엉 하버드의대 일차의료프로그램 책임자는 "만성질환 환자는 일차의료센터를 통해 상태를 관리해 응급 진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을 예방하는 것이 환자와 병원 모두에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매사추세츠주 주정부는 보다 효율적인 의료비 지출을 위해 지난 4월부터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했다. 동네 병의원에 수당을 지급할 때 담당 환자의 건강지표를 점수화해 차등 지급하는 방식이다. 한국과 똑같이 환자 수에 따라 진료비를 지급하는 종전 방식은 환자 건강 개선 효과에 비해 의료비가 많이 든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새 시스템의 작동 방식은 이렇다. 당국이 A의원에 관리 환자 1인당 100만 원씩을 지급한 뒤 주기적으로 환자 상태를 확인한다. 어떤 환자의 건강지표가 나빠져 응급실을 자주 찾았다면 수당을 줄이고, 반대로 호전되면 추가 수당을 지급한다. A의원 입장에서는 환자 건강에 대한 책임성이 강화된다. 주정부 입장에서도 환자 상태가 좋아질수록 병원에 가는 횟수가 줄어 총의료비가 줄어들기 때문에 의료기관에 수당을 올려줘도 전체적으로는 이득이다.
한국도 고령화로 의료비 지출이 가파르게 늘고 있다. 지난해 건강보험과 환자(본인 부담)가 지출한 총진료비(102조4,277억 원)가 처음으로 100조 원을 넘어선 가운데, 노인 인구는 전체 진료비의 43.1%인 44조1,187억 원을 썼다. 하버드의대 일차의료센터에서 방문교수로 활동 중인 신동수 한림대 간호대 교수는 "이제는 만성질환 관리(일차의료)에 투자하지 않으면 의료비를 줄일 방법이 없다"며 "만성질환은 완치가 아닌 꾸준한 관리가 중요하다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민수 보건복지부 제2차관은 CHA, MGB 모델에 대해 "이런 제도가 정착되면 우리나라 의료 체계가 병원 중심에서 환자 중심으로 바뀔 수 있다"며 "병원이 검사를 반복적으로 하는 것을 줄이고 질병을 막는 데 초점을 두게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보스턴= 류호 기자 h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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