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지역 최초의 인큐베이터… 치료받은 ‘네 쌍둥이’ 모두 간호사 됐다
산부인과 진료 도구를 다시 손에 쥔 이길여(91) 가천대 총장은 65년 전 인천 ‘용동 큰 우물(현 동인천역)’ 인근에서 처음 환자를 보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그 집(산부인과)은 보증금도 안 받는 데다, 자궁암 검진도 무료로 해주고, 서울대 나온 여의사가 시집도 안 가고(웃음)…독특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니 환자가 구름처럼 몰려들었죠.”
대학 축제 때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 말춤을 춰 유튜브 조회 100만회를 기록하고, 구순을 넘긴 나이에도 임플란트·보청기·지팡이 등 노년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어 ‘별에서 온 총장님’ 소리를 듣는 이 총장은 격동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겪었다. 우리말 쓰면 뺨을 맞던 일제 식민지에서 초등학교를, 해방 직후 혼란한 시기 중학교에 다녔고, 고3 땐 6·25가 터져 방공호에 들어가 입시 공부를 했다.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다면 나 역시 전쟁에 나갔을 텐데, 여자라서 피한 것이니까요. 전쟁 때 학도병으로 나간 또래 학생들, 서울대 의대 남자 동기들에게 늘 빚 갚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이길여 총장의 현대사 보물은 그런 인생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물건들이다.
◇국내 최초 심장 박동 초음파 기계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이 총장은 친구 따라 동인천 인근 개인 병원에서 잠시 일하다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만 해도 미국으로 가면 그대로 눌러앉는 유학생이 대부분이었다. 이 총장이 받은 ‘ECFMG(외국 의대 졸업생 등록 교육위원회)’ 자격증은 미국 비자 이상이었다. 그러나 이 총장은 돌아왔다. “‘내 일신의 안일을 위해 미국에 계속 살아야 하나’란 생각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고 했다.
한국에 돌아온 이 총장은 자기 이름을 내건 ‘이길여 산부인과’를 개원했다. 당시 국내 의료 현실은 처참한 수준이었다. 거즈나 기저귀는 누더기가 될 때까지 삶아서 다시 썼고, 주삿바늘은 숫돌에 갈아 재사용했다. 제대로 된 초음파 기계가 없어 아이가 배 속에서 죽은 줄 모르기도 했다. 그때 일본의 세계적 초음파 진단 기기 업체인 알로카사(社)에서 태아 심장 박동 측정이 가능한 초음파 기계가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가격으로 4000만원(현재 가치 약 9억원)이나 되는 장비였어요. 이걸 살까 말까 고민하던 차에 한 모임에서 친구가 다이아몬드 반지를 자랑하더라고요. 얼마냐고 물으니 4000만원이라고 해요. 집에 오는 길에 초음파 기계를 사야겠다고 다짐했어요. 4000만원으로 다이아몬드 반지를 사면 혼자만의 만족이지만, 최신 의료 장비를 사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기쁨이겠어요.”
당시 그 기계는 국내에 총 4대가 들어왔다. 3대는 대형 종합병원 등에 설치됐고, 나머지 한 대가 이길여 산부인과로 왔다. 처음 초음파를 보던 날, ‘쿵쾅쿵쾅’ 하는 태아의 심장 소리를 듣고 병실에 있던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4대 독자와 결혼한 임신부 진료엔 온 마을 사람들이 심장 소리를 듣겠다며 버스를 전세 내 함께 왔다. 심장 박동 소리를 듣고 싶다는 일반 시민 요청이 쇄도해, 병원 밖에서도 이를 들을 수 있게 확성기를 달기도 했다.
◇많은 생명 살려낸, 인천 최초의 인큐베이터
이 총장은 1979년 산부인과를 비롯해 내과, 외과, 소아과, 신경외과 등 10여 진료과와 의료진 120명을 갖춘 종합병원인 ‘길병원’을 인천에 설립했다. 인천만 아니라 경기도에서 가장 큰 민간 의료 시설이었다. 최신식 의료 장비도 대거 도입했다. 인천 지역에 최초로 들인 ‘인큐베이터’도 그중 하나였다. 이 총장은 “환자 한 명이라도 더 잘 치료해주고 싶어, 의료 장비 욕심만큼은 남달랐다”고 했다.
1987년 인천 구월동에 국내 최초 야간 병원인 ‘중앙길병원’을 개원할 때도 인큐베이터부터 챙겼다. 인큐베이터는 미숙아의 생명과 직결된다. 한번은 새벽 3시 소아과장에게 전화가 왔다. ‘네 쌍둥이 임신부가 양수가 터졌는데, 다니던 병원엔 인큐베이터가 없어서 우리 병원으로 왔다. 그런데 돈이 없어 보인다”고 했다. 이 총장이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우리 병원은 돈이 있어도 없어도 받는 병원이다. 병원비 생각 말고 살려라.”
그렇게 태어난 네 쌍둥이가 황슬, 설, 솔, 밀 자매다. 국내에서 두 번째로 태어난 일란성 여아 네 쌍둥이. 강원도 삼척의 광산 노동자였던 부모가 병원비를 걱정하자, 이 총장은 “병원비 받지 않을 테니 건강하게만 키워달라. 감사 인사는 나중에 의료인으로 키워 나라에 해달라. 학비는 내가 내겠다”고 했다. 정확히 19년 뒤 네 쌍둥이 부모는 이 약속을 지켰다. 자녀를 모두 간호대에 보낸 것이다. 소식을 들은 이 총장도 약속을 지켜, 네 쌍둥이의 학비를 전액 지원했다. 자매는 남편 근무지가 먼 한 명만 제외하고 모두 길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다.
◇인생의 롤모델 ‘골든 박사’와 만남
이 총장이 입버릇처럼 “돈이 있어도 없어도 받는 병원”을 외치는 건, 대학 졸업 후 군산도립병원에서 만난 ‘퀘이커(Quaker) 의료 봉사단’ 골든 박사의 영향이다. 그때 함께 찍은 사진을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 한국에선 ‘종교 친우회’라고 하는 퀘이커는 1953년부터 1957년 하반기까지 4년간 군산에 머물며, 의료 봉사는 물론이고 전쟁 중 파괴된 도립병원을 복구하는 활동을 펼쳤다.
이 총장은 미국 유학 전 영어도 익힐 겸 고향 사람도 치료해주겠다는 생각으로 군산에 내려갔다가 골든 박사와 만났다. “환자가 많이 몰려드는데, 장비는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어요. 한번은 폐렴 환자의 피고름이 입하고 코에서 막 쏟아졌어요. 흡입기가 없었어요. 다들 뒷걸음치는데 골든 박사가 뛰어들더니 자기 입으로 피고름을 다 빨아냈어요.”
이 총장은 “6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그 시절 대한민국은 의사도 없고, 돈도 없고, 환자들도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없던 때였어요. 병원은 아파서 오는 곳이 아니라 죽기 전에 오는 곳이었죠. 아, 이런 의사가 있구나, 넋이 나갈 정도로 감동을 받았어요. 평생 잊을 수 없는 커다란 깨달음이었습니다.”
◇빚 갚으려 시작한 심장병 어린이 무료 진료
이 총장도 1990년대부터 몽골과 키르기스스탄 등에서 심장병 어린이를 데려다 무료 수술을 해주고 있다. 이때 받은 훈장이 이 총장의 또 다른 보물이다. “1983년 한국을 방문한 레이건 대통령 부부가 한국 어린이 둘을 미국으로 데려가 심장 수술을 시켜주는 장면이 방송에 나왔다. 내가 의사인데, 우리나라에선 왜 할 수 없을까 굉장히 마음이 아프고 자괴감도 들었다. 1990년 이후 우리나라 의료도 비약적으로 발전해 심장병 수술을 할 수 있게 되면서, ‘내가 한이 맺혔던 그 수술 하자’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베트남·몽골·키르기스스탄 등에서 어린이 439명이 이 총장의 도움으로 무료 심장 수술을 받고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 이런 박애 정신을 인정받아 이 총장은 2009년 몽골, 2015년 키르기스스탄 정부에서 최고 의료 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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