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지공거사와 선비 정신
해외에서 홍보 활동을 하다 보면, “한류가 가능한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강대국 일본이나 중국도 못 따라잡는 우리 대중문화의 인기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개인적으로는 “한국 사람이 본디 춤추고 노래하고 술 마시는 것을 즐기는 흥이 넘치는 민족이어서 그 민족성이 한류를 통해 세계인의 마음을 흔든다”는 정보라 작가의 대답이 가장 마음에 든다.
우리 옛 선비들도 흥을 즐길 줄 알았다. 소설 ‘허생전’ 속 선비는 “10년 동안 책만 보겠다”는 대단한 선비 정신을 보여준다. 이는 인생의 의미를 추구하는 정신이다. 하지만 이런 선비들도 술에 취하면 즉흥적으로 시를 짓는 경연을 벌였다. 이런 ‘흥’이 요즘 한국 K팝 래퍼들의 유려한 랩 배틀 실력까지 이어진 것 아닐까 혼자 생각하곤 했다.
지난달 말 미국 뉴욕타임스에는 한국의 또 다른 선비들 이야기가 소개됐다. 한국의 ‘지공거사(地空居士)’ 스토리다. 거사는 관직을 하지 않고 초야에 숨어 사는 선비를 뜻하는 말인데, 요즘은 은퇴 후 지하철에서 공짜로 시간을 보내는 노인들을 ‘지공거사’라고 부른다. 기사에선 노인 무임승차 제도가 사라지면 이들의 즐거움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우울한 소식도 함께 전했다.
평생을 산업 역군으로 살아온 분들이 늘그막에 즐기는 유일한 즐거움을 빼앗는 것은 가혹해 보인다. 나라와 가족을 위해 일생 열심히 일을 한 어른들이 노후를 즐기지 못한다는 것은 정책의 실패, 사회의 실패지 개인의 실패는 아니다. 이분들에게 인생에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의미 있는 삶이란 무엇인가’ 제대로 고민해 볼 기회가 있었을까? 한국이 선진국 반열에 진입할 때쯤 성장기를 보낸 우리 세대도 ‘점수 맞춰 전공 정하기’ ‘성적 따라 직업 정하기’식 삶을 강요받느라 적성이니 흥미니 이런 것들은 모두 먼 나라 이야기였는데, 위 세대는 오죽했으랴. 그렇게 정신없이 달려와 이제 여유를 좀 찾았으니, 어쩌면 대한민국 국민 전체가 지공거사인지도 모르겠다.
선비 정신의 요체는 의미를 추구하면서도 흥을 잃지 않는 것이다. 마침 한국의 한류가 만개하고 있으니, 이제 개인과 국가의 존재 의미가 무엇인지도 한번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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