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은 날 구했고, 난 그의 손자에 장학금… 내 삶이 한미동맹 표본”

이성훈 기자 2023. 10. 24.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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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동맹 70년, 번영을 위한 동행] [13] 백성학 영안모자 명예회장
부천시 오정동 영안모자 본사에 있는 ‘영안역사기록관’에서 백성학 명예회장이 6·25 전쟁 당시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미군 빌리와의 인연을 담은 기록물들을 보며 당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이태경기자

부천시 오정동에 있는 영안모자 본사. 2층에 있는 창업주 백성학(83) 명예회장의 집무실로 들어서자, 모자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책상 뒤 신문 크기의 액자에 담긴 흑백 사진이었다. 4명의 아이들이 군복을 걸친 채 군용 텐트 앞에 서 있었다. 백 명예회장은 “1953년 6월 강원도 화천 어디쯤 있던 미군 야전병원에서 찍은 사진”이라고 했다. 백 명예회장이 미군 부대에서 키 작은 꼬마 심부름꾼이라는 뜻에서 ‘쇼리(shorty)’라고 불리며 허드렛일을 할 때였다. “6·25 전쟁 끝나기 한 달쯤 전인데, 북한군 포격으로 미군 유류 저장소가 불타는 바람에 화상을 입었지. 그때 치료 받으면서 미군 부대에 있던 하우스 보이 출신들과 찍은 사진인데, 엊그제 일처럼 기억이 선명해.”

전 세계 12개 공장에서 연간 1억 개 이상 모자를 만들어 세계 모자 생산·판매량 1위 기업을 일군 ‘모자왕’ 백성학 명예회장은 “한미동맹을 안 좋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나를 보면 생각이 바뀔 거야”라며 웃었다. 주변에선 이런 백 명예회장을 두고 한미동맹의 ‘살아있는 표본’이라고 말한다.

혈혈단신 월남해 고아로 자란 그에게 가장 필요했던 먹을 것을 준 것도, 정규 교육도 제대로 못 받은 그가 세계 무대로 나아갈 때 무기가 된 영어를 가르쳐 준 것도 미군이었다. 그의 사업도 미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만나 꽃을 피웠다. 백 명예회장은 미국과의 인연을 과거의 일로만 두지 않았다. 자신을 도와준 미군 은인을 10여 년에 걸쳐 어렵게 찾아냈고, 그의 손자에게까지 장학금을 지원하는 것으로 보은했다.

◇미군 쇼리에서 세계 모자왕으로

전쟁 전 평안북도 원산에 살던 백 명예회장은 1950년 12월 가족과 헤어져 혼자 남한으로 내려왔다. 열 살 어린 나이에 사실상 고아(孤兒)가 된 그를 거두어 준 것이 미군 부대였다. 그곳에서 ‘빌리’라는 이름의 미군을 만났다. 그는 백성학을 친동생처럼 돌봐줬다. “당시 나는 먹을 것, 입을 것이 필요해 미군을 따라 다녔는데, 빌리는 나에게 예의범절과 영어까지 가르쳐 줬어. 내가 미군들이 쓰던 영어 욕설을 쓰면 야단을 치며 못하게 했지.” 북한군 포격으로 화상을 입고 냇물에 빠졌던 백성학을 구조해 화천 병원까지 데려다 준 것도 ‘빌리’였다. 하지만 6·25 전쟁이 끝나고 빌리가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둘 사이의 연락도 끊겼다.

1952년 겨울 강원도 김화군의 미군부대 진지에서 열두 살 백성학이 빌리와 사진을 찍으며 웃고 있다./영안모자

전쟁이 끝난 후 백 명예회장은 서울 종로의 한 모자 제조 공장에 취업했다. 그렇게 한푼 두푼 모은 돈으로 1959년 서울 청계천에 모자 노점을 차려 사업을 시작했다. 끊긴 것 같던 미국과의 인연은 1967년 미국에 모자를 수출하면서 이어졌다. 납품 업체를 찾던 미국 바이어가 백 명예회장의 모자를 보고 거래를 터 줬다. “정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지만, 미군 부대 ‘쇼리’로 있으면서 익힌 영어와 매너로 미국 바이어를 상대했지. 당시 국내 모자업계에 영어 하는 사람이 없어서, 미국 바이어들이 죄다 우리 회사에 왔다고.”

사업이 자리를 잡자, 가장 먼저 한 일이 빌리를 찾는 일이었다. 1975년 주한미군 신문인 ‘스타스 앤 스트라이프스’(Stars and Stripes)에 ‘빌리’를 찾아 달라고 의뢰했다. 1980년대 중반엔 주한 미국대사관 관계자에게 ‘빌리’란 미군을 찾고 싶다며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는 빌리에 대한 그리움과 감사의 의미를 담아 1985년 강원도 홍천에 사회복지 시설 ‘백학마을’을 세우면서, 건물 이름은 ‘빌리 사랑의 집’으로 정했다. 이런 그의 사연이 미국 유명 월간지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1986년 6월 호에 6페이지에 걸쳐 게재됐다. 그리고 미국 지인의 도움을 받아 6·25 당시 빌리가 근무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300대대 출신 퇴역 군인 수십명을 미국 캔자스시티로 초청하면서 당시 찍은 사진들을 가져오게 했다. 그 속에서 ‘빌리’의 얼굴을 찾아냈다. 알고 보니 그의 본명은 데이비드 비티(Beattie). ‘비티’라는 발음을 빌리로 들었던 것이다.

1989년 그토록 그립던 빌리와 재회했다. 빌리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빌딩 청소부로 일하고 있었다. 그들의 재회 얘기는 리더스 다이제스트 1990년 2월 호에 또 실렸다. 그는 “미국 사람들은 자신들이 피 흘려 지킨 한국의 어린 고아가 성공해서 다시 자신들을 찾아온 스토리가 감동적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代를 이은 보은과 인연

빌리는 2010년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인연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백 명예회장은 빌리의 자녀와 손자들이 원하면 미국 내 영안모자 회사에 근무할 수 있도록 했다. 대학에 진학한 빌리의 손자에겐 장학금을 지원했다. 지금도 빌리의 가족과는 서로 연락을 한다. 그는 “개인적으로 은혜를 갚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6·25 전쟁 때 미국에 도움을 받았던 한국이 이제 미국을 도울 수 있는 형편이 된 것 같아 뿌듯하다”고 했다.

백 명예회장은 한국과 미국 사이의 가교 역할에도 적극적이다. 그는 미국에서 공장 등을 운영하며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의 동생인 젭 부시, 존 매케인 전 상원의원, 록펠러재단 회장을 지낸 J. 록펠러 등과 인연을 쌓았다. 한국 기업인들이 원하면 자신의 미국 네트워크를 활용해 도왔고, 미국 기업인이 한국에 관심을 가지면 한국 기업을 소개해 줬다. “한국과 미국은 눈앞의 이익 때문에 흔들릴 관계가 아니야. 나처럼 서로 돕고 도우며 오랫동안 끈끈하게 이어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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