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정의사람연구] 가해자로부터 피해자에게로

2023. 10. 23.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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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고죄’라는 장애물에 가로막혀
1990년대엔 성범죄 처벌 드물어
조두순 사건 후 관행 바뀌었지만
재판제도 여전히 피해자에 불리

범죄 피해를 당하고도 살아남은 형사피해자들이 꽉 막힌 세상을 바꾸고 있다. 성범죄를 친고죄로 두던 시절 성범죄사건은 수사도 재판도 제대로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운 좋게 신고하여 범인을 검거하였다 하더라도 피해자를 회유, 협박하기만 하면 처벌불원서를 제출하게 만들어 고소절차를 중단시킬 수 있었다. 당시에는 성범죄자가 제대로 처벌받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다 보니 경찰도 성범죄사건은 피해자 의사와 관계없이 수사하지는 않았다. 1990년대 화성연쇄살인이 사실상 화성연쇄 성폭행사건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피해자 입장에서는 가해자와 그를 비호하는(?) 수사기관 때문에 억울함을 호소할 길이 없었다. 정절을 지키지 못한 여성이라는 사회적 비난 이외에도 당시에는 엄연했던 친고죄란 장애물이 번번이 수사 의지를 꺾어 놓는 측면도 있었다.

이런 모든 관행을 바꾼 사건이 바로 조두순 사건이다. 그의 아동 생존 피해자 나영이(가명이니 그대로 호명하기로 하자)의 생환기록은 여과 없이 보도됐고 모든 국민에게 가해자의 처벌 여부를, 생사를 넘나드는 나영이에게 맡겨두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지 목도하였다. 수사기관은 나영이의 상처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혈하는 여덟 살짜리를 데려다 십 수 번 조사하였고 법원은 나영이를 조두순과 대면시켜 처벌 의향을 물어보았다. 근엄하신 재판장님의 호된 꾸중은 그다음에서야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을 보면 친고죄라는 단순한 형사절차의 요건이 어린 피해자에게는 얼마나 가혹한 것인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강간도 강도사건처럼 피해자가 친히 고소를 하고 처벌의 의지를 불태우지 않아도 형사소송이 진행될 수 있게 되었다.
이수정 경기대 교수·범죄심리학
최근 꽉 막힌 재판제도에 대항하여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처절하게 싸우는 또 한 명의 피해자가 등장하였다. 부산 오피스텔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온전한 상태로 귀가하던 여성을 출소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전과 17범이 돌려차기를 하여 순식간에 제압하고 성폭행하였다. 그녀도 나영이처럼 죽을 고비를 넘겼다. 오랫동안 의식 없이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는 동안, 이 사건은 중상해로 취급되어 송치됐고 검찰에서 살인미수로 죄명 변경을 해 1심 재판까지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의식을 찾은 피해자는 뒤늦게 대응하기 시작하였고 공판기록을 보고자 하였다. 하지만 당시 그녀는 재판의 피해자이기는 하였으나 재판의 당사자가 아니란 이유로 수사기록 하나 확보하지 못하였다. 차후 민사소송을 제기함으로써 우리가 이미 방송을 통해 시청한 그 영상을 확보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묻지마 폭행이라 주장했던 피의자의 주장대로 사건이 진행되어 버렸지만 뒤늦게 검찰 측에서 피의자의 DNA를 피해자의 바지 속에서 확보하였고 항소심에서 성범죄 혐의를 추가하였다. 그러나 강간 대신 유사강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 성폭행 혐의는 재판부에서 인정되지 않았고 강간살인미수만 인정되어 항소심에서 양형은 1심보다 8년이 늘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사소송까지 제기하여 자신을 엄벌하게 만든 피해자에 대하여서 피의자는 공공연히 보복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고 한다. 수용시설 내에서 해코지만을 꿈꾸고 있는 그로부터 과연 이 피해자를 십 수 년 후 안전하게 지킬 수 있을 것인가?

며칠 전 ‘부산 돌려차기 사건’의 항소심을 담당하였던 부산고등법원의 법원장이 국감에 나와 재판엔 문제가 없었다고 말하였다. 이는 “피해자가 저렇게 뛰어다니고, 일곱 번 탄원서를 내고, 방송에 나오지 않았어도 판사가 추가 성범죄 검사를 허락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라는 의원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재판이 문제없었다는 법원장은 나아가 “화살의 방향은 검찰을 향해야 합니다. 법원이 기소되지 않은 공소사실로 심리해 나갈 순 없는 노릇입니다”라고 했다. 일설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그녀는 재판에 직접 참여해야만 하였고 공판기록을 보기 위해 민사소송을 추가로 제기했어야만 했던 것이다. 법원은 그녀에게 ‘피해자는 사건의 당사자가 아니다’라며 ‘(사건기록을 보려면) 민사소송을 걸라’고 했다고 알려진다.

형사재판에서 피해자의 위치는 어디인가? DNA보다도 정확률이 떨어지는 정황증거 정도인가? 아니면 절차도 모르는 짜증 나는 민원인인가? 국감에 증인으로 참석하였던 소위 ‘돌려차기’ 사건의 피해자가 한 증언이다. “사법부는 피해자를 ‘방해하는 사람’으로 여기고 있다. 재판기록 열람, 성범죄 추가조사만 해 줬어도 보복 협박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탄식하였다. 그녀는 떠나기 전 “저는 20년 뒤에 죽을 각오로 피해자들을 대변하고 있다”는 말을 남겼다. “제 사건을 빌미로 힘없는 국민들을 구제해주셨으면 좋겠다”는 말 또한 남겼다.

바뀌어야 한다. 이번에는 형사사건의 피해자를 바라보는 법원의 입장이다. 당신들은 기계적인 법 집행자인가? 아니면 진정으로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법수호자인가? 만일 후자가 맞는다면 범죄피해자의 이 절절한 목소리를 검찰 탓만으로 돌릴 수 있는 것인가?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가을 하늘에 창피하지도 않은 것인가?

이수정 경기대 교수·범죄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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