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설] 화학적 사이보그의 자부심
최근 항우울제를 처방받았다. 다니고 있는 병원의 의사 선생님과 깊이 상담한 결과였다. 이로써 내가 매일 먹는 약은 세 가지가 되었다. 여기에 필요할 때만 챙겨 먹는 수면제와 ADHD(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를 위한 약을 포함하면 병원에서 처방받는 약은 다섯 가지다. 생리 기간에는 진통제를 먹는다. 으슬으슬하다 싶으면 해열제를 먹는다. 또, 까먹지만 않으면 종합비타민과 루테인을 꼬박꼬박 먹는다. 영양과 관련해서는 프로틴 드링크를, 향정신성 물질로는 커피를 자주 마신다.
이것들은 내가 건강하고 능률적으로 생활하는 데 영향을 준다. 내 몸은 약물에 정직하게 반응한다. 나는 인간 생명체이고, 그러므로 또한 화학물질로 움직이는 생화학 기계다. 카페인을 섭취하면 잠이 깨고 메틸페니데이트를 먹으면 집중력이 향상된다. 약을 먹으면서 나는 원하는 대로 상태를 조절한다. 만능은 아닐지라도 상당한 선택권을 쥐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처방약이라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환자인 동시에, 나라는 사람의 필요를 스스로 판단하고 생활을 꾸려 나가는 운영자다. 내게는 취약성과 주체성이 한데 섞여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복합적 성격을 믿기 어려워한다. ‘아무리 그래도 커피랑 약은 다르지’라든가 ‘치료가 필요한 사람과 아닌 사람이 어떻게 같아?’라고 선을 그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비정상’은 종종 명확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환청, 공격성, 자해 등은 일반적이지 않으며 일상생활을 힘들게 한다. 그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원론적으로 말하면 ‘다른’ 사람에게는 그에 맞게 생활을 꾸리는 방법이 있다. 주체성의 내용과 종류가 다를 뿐이다.
그리고 경계가 모호한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는 점도 분명하다. 화를 벌컥 내는 버릇이 있는 사람은 치료가 필요할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우울증을 진단받은 사람이 몇년 후 증상에서 벗어나기도 한다. 나의 경우엔 여러 병원에서 ADHD일 리가 없다는 말을 들었다. ADHD라고 보기엔 충분히 성실하고 좋은 성취를 유지하고 있다는 이유였다. 그래서 몇번이나 주저한 다음에 검사를 신청했다. 뇌파 검사를 포함해 20만원짜리 검사를 진행한 결과는, ADHD가 확실하다는 거였다.
ADHD 약인 메틸페니데이트는 효과가 즉각 나타난다는 점이 특징이다. 꾸준히 먹지 않아도 괜찮다. 필요할 때만 먹어도 문제가 없다는 것이 의사의 처방 내용이었다. 나는 집중해서 일하고 싶은 날에 약을 먹고 몸과 마음을 든든하게 정비한다. 이때 나는 강력한 자기효능감을 느낀다. 일전에 과학잡지 ‘에피’와 웹진 ‘비마이너’의 공동기획으로 연재되었던 유기훈의 글을 참고하면, ‘화학적 사이보그’가 되었다는 자부심이다. 내가 어떤 상태로 살고 싶은지 스스로 선택하고, 보조장치를 적절히 활용해 원하는 바를 성취하고 있다는 감각이다.
정신건강은 개개인의 맥락이 워낙 천차만별인 탓에 내 경험을 일반화할 수는 없다. 그래도 누군가는 반드시 나와 비슷한 자리에서 고민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그런 이에겐 화학적 사이보그가 되어보는 길을 권하고 싶다. 자기를 이해하고 이리저리 움직여보는 일에는 분명 반짝이는 기쁨이 있다.
심완선 SF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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