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승우의 풀뿌리] 금융사기 피해를 개인이 책임져야 할까
지난 추석 때 가족들이 모인 김에 집안일에 쓸 모임통장을 하나 만들었다. 연구소 계좌로 이용하던 인터넷은행에 계좌를 하나 더 만들고, 두 명에게 계좌번호를 공유했다. 그런데 몇 시간 뒤 모르는 사람에게서 3만원이 입금되더니 다음날엔 또 다른 입금자명으로 50만원이 입금되고 두 시간 뒤에는 전기통신 금융사기 이용계좌로 신고돼 지급정지가 되었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일요일이라 다음날 아침 고객센터로 전화를 걸었더니 메시지는 사실이고, 은행은 내게 다른 은행 출금도 제한될 것이라 ‘통보’했다. 영문을 알 수 없으나 나도 피해자인데 이렇게 일방적으로 결정될 수 있냐고 주장했지만, 은행은 보이스피싱 범죄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답했다. 은행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계좌가 해킹되었을 거라 말하지만, 한 달이 지나도록 다른 해킹 피해가 없는데 계좌번호는 어떻게 유출되었을까?
거대한 족쇄가 된 인터넷은행 편리함
이때부터 4년 전부터 사용해온 연구소 계좌도 이용정지돼 회원들의 회비납부조차 불가능해졌다. 은행과 연계된 서비스들은 중단되었고, 인터넷은행의 편리함은 거대한 족쇄가 되었다. 인터넷은행이 아닌 시중은행의 경우 창구출금이 가능하다고 했지만, 그동안 이용해온 은행은 우리 지역에 지점이 없어 인근 도시로 나가야만 했다. 더구나 은행들은 신고인을 피해자로, 나를 “금융사기 전력이 있는 고객” “금융사고 예방 대상자” “전화금융 사기 명의자”라고 지칭했다.
이렇게 불편함과 스트레스가 한 달 동안 쌓여가고 피해가 계속 누적되고 있음에도 책임을 물을 곳이 없다. 은행의 기계적인 매뉴얼과 형식적인 답변에 짜증이 났지만 노동자와 싸우기는 싫었다. 고객센터에 이의제기 신청서를 제출했지만 그건 전자상거래상 발생한 사안에만 해당된다며 거부당했다.
답답한 마음에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타인의 계좌에 입금하고 사기로 신고해 거래정지시킨 뒤 합의금을 뜯어내는 ‘통장협박’이라는 신종사기가 유행하고 있었다. 아직 협박 메시지를 받지 못했지만 돈을 돌려주겠다는 은행의 중재조차 거부한다는 신고인의 의도를 알 수가 없다.
가장 답답한 점은 아무런 방어권을 행사할 수 없는 상태라는 점이다. 은행은 처음에는 개인정보보호와 유사사례 예방을 위해 내게 아무런 정보도 줄 수 없다고 말했고, 신고인이 은행과의 중재를 거부하자 수사기관과 직접 소통하라며 발을 빼버렸다. 한 달이 지나도록 내게는 최소한의 변론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은행은 정말 아무런 책임이 없을까? 모두의 살림살이가 어려운 와중에도 2022년에 국내 은행은 전년 대비 9.6% 증가한 18조5000억원의 당기순이익을 거뒀고, 인터넷은행도 큰 흑자를 기록하며 잔치를 벌였다. 은행이 벌어들이는 순이익의 상당 부분은 이자수익임에도 예금을 보호해야 하는 은행의 책임은 사라지고, 사기에 대한 책임은 개인의 불운 탓이 되어버렸다.
정부와 은행이 책임 분담해야 할 때
경찰청에 따르면 국내 보이스피싱 피해액과 피해건수는 2022년 기준 5438억원, 2만1832건으로 계속 감소 중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사기이용계좌로 지급정지가 되는 건수는 매년 빠른 속도로 증가해 2020년 2만191건에서 2022년 3만3897건으로 늘어났다. 신속하게 계좌를 막는 것도 필요하지만 신종 사기수법에 대응하려면 보완하는 대책들도 필요한데, 그런 노력은 잘 보이지 않는다.
은행이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정부가 제도를 점검해야 할 텐데, 정부의 움직임도 느리긴 마찬가지이다. 명의인이 사기와 연관되지 않았음을 자료로 소명하며 지급정지에 대해 이의신청을 할 경우 해당 금액에 대해서만 지급정지 조치를 하는 ‘전기통신금융사기 피해 방지 및 피해금 환급에 관한 특별법 일부개정안’이 지난 7월 국회에 제출됐지만 아직 소관위원회조차 통과하지 못했다. 정부와 은행이 책임을 회피하는 동안 시민들의 피해만 늘어나고 있다.
그나마 나는 주변의 도움으로 버티고 있지만 입출금이 잦을 수밖에 없는 자영업자였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한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인터넷을 뒤지고 금융감독원에 민원이라도 넣을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이라면 얼마나 곤란해졌을까. 처음에는 최대한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자는 생각뿐이었지만 이제는 누적되는 피해를 기록하며 이 피해를 어떻게 분담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개인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사회에는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하승우 이후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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