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살균제 피해 `상처뿐인 12년`-하] 정부의 `강건너 불구경`… 피해자는 두번 운다

김수연 2023. 10. 23. 19:38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정부, 기업 책임·피해자 문제 해결 '미온적 태도'
'인정 받은자 vs 못 받은자' 내부 싸움에 2차 피해
지난 8월 31일 서울역 앞 계단에서 '가습기살균제 참사 12주기 캠페인 및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계단에는 가습기살균제 참사 피해자들의 유품이 놓여있다. 연합뉴스

가습기 살균제 참사가 처음으로 드러난 2011년부터 지금까지 피해자들은 승자 없는 싸움에 내몰려 왔다. 긴 시간이 지나면서 피해자 간 갈등도 커져왔다.

정부가 인정한 피해자와 정부로부터 피해인정을 받지 못한 이들, 정부로부터 피해자로 인정 받았음에도 기업으로부터는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이들로 나뉘어 돌아가는 상황의 유불리에 피해자들의 촉각이 곤두세워지고 있다. 피해자들은 정부도, 기업도 사실상 '강 건너 불 구경'만 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인지하면서, 이들은 스스로를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는 위기감에 휩싸여 있다.

가습기살균제는 1997년 최초 출시 이후 판매가 중단된 2011년까지 연간 60만개가 팔렸다.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한 뒤 건강이 악화된 피해자는 약 67만명(2020년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집계치)으로 추산되고 있다. 사망자는 약 1만4000명으로 추산된다.

피해지원 신청은 한국환경산업기술원이 접수를 시작한 2011년 11월 11일부터 올해 9월30일까지 총 7870건이 접수됐다. 현재 제5차 신청 접수가 진행 중이다.

이러한 가운데 지난달 환경부는 '제36차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위원회'를 열고 추가로 총 599명에 대한 구제급여 지급 여부, 피해등급 결정, 폐암 피해구제 계획과 피해 인정 등을 심의·의결했다. 이에 따라 가습기살균제 구제급여 지급 대상자(피해인정자)는 총 5176명(누계)이 됐다.

피해자들은 정부가 스스로의 역할을 이러한 행정적인 일처리로 한정을 짓고 있고 결국 이것이 피해자 간 갈등을 격화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참사의 책임 문제에서 한발 떨어진 정부의 제스쳐에 이 문제가 기업과 피해자 간에 풀어야 할 문제로 프레임화되고, 결국 구제를 받기 위한 피해자들간 '각개전투'가 이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 피해자 집단의 상황 변화가 내가 속한 피해자 집단에 유리하게 작용할지 불리하게 작용할지부터 따져야 하는 환경에 방치되면서 피해자 간 갈등은 첨예해지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국가손해배상소송 건이 이 같은 갈등 양상을 드러내준다. 앞서 '세퓨'라는 업체의 가습기 살균제를 쓴 피해자(유가족 포함)들은 2014년 국가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1심 재판부는 국가에 손해배상을 할 의무는 없다고 판시했으나 피해자들이 항소해 2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세퓨 외에 다른 기업의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한 피해자들도 국가 상대 손해배상을 제기하고 1심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이 법정공방을 불안한 시선으로 지켜보는 이들이 있다. 바로 특별법 시행 이후인 2017년 이후에야 법적으로 피해자로 인정받은 이들이다.

2017년 이후 특별법에 따라 피해자로 인정받은 한 피해자는 "우린 정부에서 (특별법에 따라)피해자로 인정해줬지만, 지금 국가와 소송 중인 이들은 법이 없는 상태에서 기업이 (피해자라고)인정해준 이들"이라면서 "이들은 기업에서 먼저 인정해줬기에 국가손해배상 소송도 유리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런데 우리는 법적 (피해)인정자들임에도, 기업은 우리를 피해자로 인정을 해주지 않고 있다"면서 "우리도 기업과 합의를 본 이후에 국가소송을 할 생각이었데, 아무래도 우리는 국가소송에서 이들보다 더 불리한 피해자가 되는 것 아닌지 우려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피해자들이 기업과 합의를 이루게 되면, 정부 입장에선 잠재적 국가손해배상소송 원고 7000여명(피해구제 신청자수)이 쏟아지는 셈"이라며 "정부는 이런 상황이 오는 게 두려워 기업과 피해자 간 합의를 적극적으로 돕지 않고, 오히려 한발 빼고 있는 건 아닌가"라고 지적했다.

이처럼 피해자들은 국가도, 같은 피해자들도 믿을 수 없는 외로운 싸움에 내몰려 있다. 일각에선 국가가 피해 인정 기준을 넓히는 과정이 매끄럽지 못하면서 피해자 갈등이 증폭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환경산업기술원은 가습기 살균제 피해등급 판정 방법을 기존 질환별 심사 방식에서,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건강 악화 여부에 초점을 두는 방식으로 변경한 바 있다. 이에 따라 피해 인정 기준이 넓어진 상태다.

현재 기술원의 피해등급 기준에 따라 민간조정위원회인 가습기 살균제 피해구제조정위원회가 가해기업으로부터 받을 금액(조정안)을 도출한 상태인데 옥시레킷벤키저, 애경산업 등 두 가해기업의 비동의로 인해 논의가 멈춘 상태다. 문제는 피해자들 사이에도 이 조정안에 대한 찬반 갈등이 좁혀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조정위 관계자는 "조정안에 반대하는 분들 대부분은 피해인정이 아예 안 되는 단순노출자나, 피해인정은 되지만 단계나 등급이 낮아 조정 금액이 적은 분들"이라며 "이분들은 본인들도 법에서 인정한 피해자인데, 초기에 옥시 등 가해기업으로부터 수억, 많게는 수십억을 받은 폐섬유화 질환 피해자들하고 왜 차별하냐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가습기 살균제 피해구제 문제는 해결점 찾기에 실패하면서 '피해자들의 빠른 일상 회복'이라는 목표 지점에서 점점 빗겨서고 있다. 가해기업들과 정부, 피해자들이 다시 목표 지점을 향해 논의를 지속할 수 있도록 사회적 관심을 어어갈 때다.김수연기자 newsnews@dt.co.kr

Copyright © 디지털타임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