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묻은 건반' 거장…"청중 위해 고통도 삼킨다"

김수현 2023. 10. 23. 18:4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 예핌 브론프만
'세계 3대 악단' RCO와 11월 내한
명지휘자들이 앞다퉈 찾는 거장
"관객들을 실망시킬 수 없었다"
손 부상에도 선보인 '피의 명연'
리스트 피아노 협주곡 2번 연주
"사적 감정 없애고 작품에 집중"
"韓, 청중 열정·연주자 재능 대단"
RCO와 최고의 앙상블 확신
러시아 출신의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예핌 브론프만. 롯데문화재단 제공


‘피 묻은 피아노’. 2015년 10월 12일 오스트리아 빈 콘체르트하우스에서 찍힌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공연 사진에 붙은 짧은 문구다. 환한 조명에 눈부시게 반짝여야 할 피아노의 하얀 건반은 핏자국으로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예핌 브론프만이 2015년 10월 오스트리아 빈 콘체르트하우스에서 열린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공연에서 연주한 피아노의 모습. slippedisc 캡처

스릴러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이 사진을 낳은 사람은 러시아 출신의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예핌 브론프만(65). 공연 당일 날카로운 물체에 손가락이 심하게 찢어지는 사고를 당했는데도 연주를 강행하다 이렇게 됐다. 연주 도중 수술 상처가 벌어지면서 건반에 피가 고이기 시작했지만 브론프만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청중의 열광적인 환호에 앙코르까지 다 마친 뒤에야 그는 피아노 건반에서 손을 뗐다.

“청중을 실망하게 할 순 없었다.” 피아니스트에게 치명적인 손 부상에도 왜 연주를 취소하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당시 그가 한 대답이다.

‘피의 명연(名演)’으로 클래식 애호가들을 울린 거장 피아니스트 브론프만이 한국을 찾는다. 다음달 11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리는 네덜란드 명문 악단 로열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RCO·지휘 파비오 루이지) 내한공연의 협연자로 서기 위해서다. RCO는 빈 필하모닉,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 ‘세계 3대 오케스트라’로 꼽히는 최정상 악단이다.

지난 22일 한국경제신문과 서면으로 만난 브론프만의 연주 철학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손에서 피가 나든, 엄청나게 혼란스러운 일이 바로 옆에서 일어나든 연주자는 연주에만 몰두해야 합니다. 고통스럽다고, 불편하다고 집중력을 잃으면 안 됩니다. 연주자는 음악으로 말하는 사람인데 좋은 연주를 못 보여주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전부 변명일 뿐이죠.”

브론프만은 주빈 메타, 다니엘 바렌보임, 사이먼 래틀 같은 명지휘자들이 앞다퉈 찾는 이 시대 최고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이다. 러시아에서 태어나 10대 때 미국으로 이주한 그는 1989년 카네기홀 데뷔 무대로 이름을 알렸다. 2년 뒤 미국의 전도유망한 연주자에게 주는 에이버리 피셔상을 받았고, 1997년에는 버르토크 피아노 협주곡 앨범으로 그래미상까지 거머쥐었다. 이후 빈 필하모닉, 베를린 필하모닉, RCO 등 세계 3대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수많은 호연을 남겼다.

브론프만이 이번 공연에서 연주하는 작품은 리스트 피아노 협주곡 2번이다. 단악장이지만 서정적인 주제가 변주를 거듭하면서 매 순간 새로운 테크닉과 다채로운 음향을 불러일으키는 곡이다. “리스트 협주곡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변화무쌍한 악상들이 담겨 있어요. 개인적인 감정은 최대한 배제하고, 작곡할 당시 리스트의 생각과 심경을 청중에게 그대로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브론프만에게 가장 많이 따라붙는 수식어는 ‘러시아 낭만음악의 스페셜리스트’다. 하지만 정작 그는 이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러시아 작곡가 작품이든 헝가리 작곡가 리스트의 작품이든 자신에겐 모두 똑같이 의미 있는 음악이란 이유에서다.

“러시아, 헝가리, 독일, 프랑스로 나눌 것 없이 모든 음악이 제겐 각별해요. 작품마다 나름의 특색이 있거든요. 첨예하게 파고들수록 서로 다른 면들이 명료하게 드러나죠. 그러니 ‘러시아 낭만음악 전문’과 같은 특정한 수식어로 저를 한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른 연주자들도 저와 마찬가지일 겁니다.”

브론프만은 국내에서도 마니아층이 두터운 피아니스트다. 1988년부터 꾸준히 방한한 덕분이다. 2019년 대구콘서트하우스에서 열린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내한공연에서 협연을 맡은 인물도 그였다.

“한국 문화를 다 좋아하지만 특히 클래식 음악을 향한 청중의 뜨거운 관심에 깜짝 놀랐어요. 정말 열정적이죠. 또 한국 연주자들은 대단한 음악적 재능을 갖고 있어요. 미국에서 공부할 때 ‘정 트리오’(첼리스트 정명화·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피아니스트 정명훈), 바이올리니스트 김영욱 등의 연주를 매우 인상 깊게 봤습니다. 그런 한국에서 연주할 수 있는 건 큰 기쁨이죠.”

RCO에 대한 기대도 감추지 않았다. “RCO는 실력, 명성, 전통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예요. 음악을 대하는 태도와 방식에서 RCO의 개성은 확실히 드러나죠. 워낙 실력 있는 악단인 만큼 저와 좋은 앙상블을 선보일 것이라는 데 한 치의 의심도 없습니다.”

이번 공연에서 RCO는 베버 ‘오베론’ 서곡,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 등도 함께 연주한다.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

클래식과 미술의 모든 것 '아르떼'에서 확인하세요
한국경제·모바일한경·WSJ 구독신청하기

Copyright © 한국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