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반전 스토리 배우러”… 세계은행 환경국장, 8개국 대표단 이끌고 서울 온 사연
‘베트남’ ‘필리핀’ ‘태국’ ‘말레이시아’…
23일 오전 서울 동대문구 글로벌지식협력단지(GKEDC). 회의실 탁자 위로 국가명이 적힌 명패가 놓이기 시작했다. ‘세계은행’(WB) 문구가 적힌 명패도 보였다. 국제금융기구인 세계은행의 환경 분야 수장이 환경 전문가 17명과 8개국 26명 대표단을 이끌고 서울에 출동했다. “한국의 반전(turnaround) 스토리를 배우러 왔다”고 했다.
최근 한국이 동남아를 비롯한 개발도상국의 ‘환경 롤모델’로 급부상하고 있다. 이들은 오는 27일까지 한국에 머물며 한국환경산업기술원의 창업·벤처 녹색융합클러스터 등을 둘러볼 예정이다. 환경산업기술원은 2017년 세계은행과의 업무 협약을 시작으로 올해 9월 아프리카개발은행과 협약을 맺으며 세계 5개 다자개발은행과 모두 협력 관계를 맺고 있다.
세계은행이 한국을 주목하는 이유는 한국이 환경 문제를 빠르고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기술을 가졌다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6·25 전쟁 후 30여 년 만에 단기 경제성장을 이뤘다. ‘한강의 기적’으로도 불렸다. 하지만 동시에 부작용인 다양한 환경 문제에 직면했다. 특히 쓰레기 처리가 문제였다. 1970년대에는 분리수거와 재활용 인프라, 처리 역량이 없어 ‘폐기물 대란’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세계 최초로 국가 차원의 종량제 등을 도입했다. 악취와 침출수 문제가 불거졌던 난지도에는 공원을 조성했다. 이곳으로부터 나오는 메탄가스는 발전에 쓰고, 폐열(廢熱)은 인근 아파트에 난방과 온수 등을 공급하는데 사용한다. 그 결과 약 30년 전 매일 2.3kg 이상 배출되던 생활 폐기물 양은 2021년 1.1kg로 줄었다.
발레리 히키 세계은행 환경국장은 본지 인터뷰에서 “한국은 플라스틱 폐기물의 순환을 성공적으로 이뤄가고 있는 ‘반전 스토리(turnaround)의 대명사’”라며 “지난 수십 년 간 폐기물 관련 분야에서 혁신을 일으키며 기술의 최종 결과물(high technology) 뿐 아니라 혁신의 과정과 노하우를 축적했다”고 했다. 그는 세계은행에서 환경과 천연자원, 청색경제 분야 등을 담당한다.
세계은행은 지난해 초 한국환경산업기술원에 이번 세미나 개최를 먼저 제안했다. 이후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세계 각국이 환영한다며 참석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발레리 히키 국장에게 왜 한국을 택했는지 묻자 “이런 국가는 한국이 유일하기 때문”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런 국가라는 건 무슨 뜻인가.
“한국은 성장과 탈탄소화, 오염 감소를 동시에 달성한 국가다. 1980년대 한국의 1차 폐기물 관리 정책은 ‘사후 처리’에 집중돼 있었다. 1990년대에는 재활용을, 2000년 이후에는 자원순환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폐기물 정책이 진화했다. 그 결과 현재는 50%가 넘는 재활용률을 보이고 있다. 동아시아 국가에서는 지난 20년 간 엄청난 경제 성장을 이뤘다. 하지만 그만큼 플라스틱을 포함한 폐기물 배출량도 늘었다. 통상 경제가 성장하면 폐기물이 큰 폭으로 증가하는데, 한국은 경제성장율 보다 폐기물이 훨씬 적게 증가한 모범사례다.”
실제 최근 아시아태평양 지역은 급속한 도시화로 인한 폐기물 관리 문제에 직면해 있다. 캄보디아·필리핀 등 아세안 내 6개국에서 2021년에만 플라스틱 쓰레기 약 840만t 이 발생했다. 세계은행 연구에, 따르면 필리핀·태국 등에서 재활용이 가능한데도 폐기하는 플라스틱으로 인한 금액은 매년 60억 달러(약 8조1500억원)에 달한다.
그는 “한국은 순환경제 부문에서 세계적인 국가”라며 “경제를 발전시키면서도 오염은 최소화하는 ‘디커플링’(decoupling) 노하우에 대해 많은 나라들이 관심을 갖고 있다”고 했다.
-세계은행이 플라스틱 폐기물 문제에 집중하는 이유는.
“플라스틱으로 인한 오염은 국가 간의 경계가 모호한 전 세계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어떤 물건이 특정 국가에서 생산되고 사용된다고 해서 그곳에서 반드시 처리되는 건 아니다. 플라스틱 폐기물은 강이나 바다를 통해 전 세계로 흘러간다.
-아태지역 국가에도 스스로 플라스틱 폐기물을 줄여야 하는 요인이 있나.
“플라스틱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전 세계 뿐 아니라 아태지역의 경제 발전에도 도움이 된다. 정부가 재활용 인프라에 대한 투자를 늘리면 수거나 처리, 플라스틱을 활용한 신소재 제조에 등의 과정에서 새로운 일자리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플라스틱 제품의 전체 가치 사슬에 걸쳐 일자리를 늘리는 셈이다. 또한 빈곤국의 경우 산림 같은 천연 자원을 잃으면 2030년까지 GDP의 10% 정도가 감소하게 된다. 이런 국가들은 자연이 없으면 발전하기 어렵다.
문제는 현재 많은 국가의 지역 사회와 소상공인에게 일회용 플라스틱은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사업을 운영하며 생계 유지를 위해 필요한 현실적인 유일한 수단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공정한 전환’(just transition)을 위해 빈곤한 지역의 수요와 현실을 고려해서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경제 성장과 환경보호, 기후적응 문제는 별도의 사안이 아니며 경제 성장과 환경보호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다.”
지난 9월 기준 세계은행은 총 139개 환경 지원 사업에 대해 153억5000만 달러(약 20조 7685억원)의 자금을 운용하고 있다. 세계은행은 2019년 전체 자금 지원의 최소 35% 이상을 환경 문제에 쓰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지난해 세계 은행이 환경 분야에 지원한 금액은 330억 달러(약 44조 6650억원)에 달한다.
발레리 히키 국장은 “플라스틱을 생산해 사용한 후 그대로 폐기하는 현재의 선형적인 플라스틱 관리 방법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했다. 플라스틱 폐기물의 감축과 재사용, 재료 재활용, 에너지 회수, 안전한 처리 등의 과정이 순차적으로 이뤄져야 장기적인 플라스틱 감축을 이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업계에서는 이번 방문이 국내 환경 기업의 다자개발은행(MDB) 사업 수주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2021년 기준 5대 MDB 조달 금액 367억 달러(약 49조6100억원) 중 한국 기업의 수주 실적은 3.5%(약 1조7500억원) 수준인데, 이 중 환경 분야가 1% 미만으로 매우 미흡한 상태다. 최흥진 한국환경산업기술원 원장은 “세계은행 뿐 아니라 그간 여러 다자은행에서 한국의 사례와 기술 등에 대한 공유 제안이 있었다”며 “이 자리가 플라스틱 폐기물 관리 문제를 풀어가는 영감(insight)을 얻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세계은행(WB·The World Bank)
개도국에 경제 개발 자금을 지원하는 다자개발은행이다. 최근 국제 환경 문제가 심화하면서 환경 분야가 경제 개발의 ‘큰 손’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지난 5년(2016~2020년) 간 다자개발은행의 환경 사업 규모는 총 635억6400만 달러(약 70조원)에 달한다. 이 중 세계은행이 57% 차지하며 비중이 가장 크다. 이어 아시아개발은행 26%, 미주개발은행 8%, 아프리카개발은행 7% 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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