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칼럼] 허울뿐인 팬데믹 대응 국제사회 협력…백신·기술부터 공유해야
9월 20일(이하 현지시각)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UN) 총회 고위급 회의에서 ‘팬데믹 예방, 대비와 대응(PPPR·Pandemic Prevention, Preparedness, and Response)’을 위한 신속하고 지속적인 리더십 구축을 위해 글로벌 연대가 필요하다는 점을 확인한다는 내용의 정치적 선언문이 채택됐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지난 5월 코로나19에 대한 ① ‘국제적 공중보건 비상사태(PHEIC) 선언’을 해제한다고 발표한 지 4개월여 만에 팬데믹(pandemic·감염병 대유행) 재발 방지를 위한 글로벌 협력에 대한 논의가 수면 위로 부상한 것이다. 선언문에는 형평성과 인간 존중을 우선시하며, 필요에 따라 일관되고 강력한 국가적, 지역적, 글로벌 행동을 이행하기 위해 회원국 간, 관련 유엔 기관 및 기타 관련 국제 조직 간 협력과 다자간 약속을 강화하자는 내용이 담겼다. 글로벌 PPPR 역량 강화에 쓰일 자금 지원을 위해 2022년 11월 팬데믹 펀드가 출범했지만, 보건 비상사태 대비를 위해선 연간 약 300억달러(약 40조3800억원)가 필요할 것이라는 내용도 선언문에 담겼다. 이날 유엔총회 기조연설자로 나선 윤석열 대통령도 “팬데믹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유엔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의 협력으로 재정 여건과 기술력이 미흡한 나라에 대한 지원이 더욱 과감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필자는 팬데믹 재발과 확산 방지를 위해선 허울뿐인 약속이나 선언보다는 “모든 국가에서 팬데믹 제품(백신)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보장하고, 각국이 이를 수행하는 데 예상되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이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강조한다. 이를 위해 팬데믹 상황에서 강력한 지식재산권(IP) 면제에 동의하고, IP 사용을 부당하게 방해하는 제약 회사에 대한 엄격한 처벌 규정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류는 지난 수십 년간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에볼라,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조류독감 등 소규모 감염병을 겪어왔다.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이 닥쳤을 때는 무방비 상태였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감염병의 위협을 예견하고 국가안보회의(NSC) 내에 글로벌 보건 안보 및 바이오 방어 부서를 신설했지만, 후임자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이 부서를 폐쇄해 버렸다.
언젠가는 또 다른 팬데믹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국제사회는 다음 팬데믹을 더 잘 대처할 방안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지난 9월, PPPR을 주제로 한 유엔 고위급 회의에서 획기적인 ‘정치적 선언’이 발표됐다. 13페이지 분량의 선언문에는 팬데믹이 국가 보건 문제를 넘어 국가 및 글로벌 안보와 경제 문제이며 기후변화와 마찬가지로 전 세계적인 시스템적 위험이자 인류에 대한 실존적 위협이라는 주장이 담겼다. 이는 ② 팬데믹행동네트워크(Pandemic Action Network)의 공동 설립자인 캐럴린 레이놀즈(Carolyn Reynolds)가 주장해 온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는 당연한 말 아닐까. 일각에서는 이번 선언이 역사적이라고 환영했지만, 각국 정부는 어떤 확약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다음 팬데믹에 더 잘 대비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이미 알고 있다. 코로나19가 전 세계로 확산한 후, 부유한 나라에서 비축하고 있던 의약품을 구하지 못해 가난한 나라에서 수백만 명의 사람이 사망했다. 백신, 진단 키트, 개인 보호 장비, 치료제 등 팬데믹 병원체와 관련된 모든 IP에 대한 면제와, 기술을 공유하고 빈곤국을 돕는 데 필요한 모든 자금을 제공하겠다는 약속이 필요했다. 그러나 코로나19 위기 동안 우리는 국제 거버넌스를 가장 강력하게 옹호하는 미국조차도 자국의 이익과 상충하는 규범(규제)을 양심의 가책 없이 위반하는 것을 봤다.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사람들의 이동을 일부 제한하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코로나19 관련 필수 의약품의 수출을 차단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또한 우리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용기 있는 정보 공개 청구와 (백신 계약) 정보 유출을 통해 글로벌 대형 제약 회사들이 비양심적으로 선진국에서 개발도상국보다 더 낮은 가격을 책정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또한 일부 제약 회사는 신흥국 시장의 국민이 의약품을 절실히 필요로 함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생산 중인 의약품의 대부분을 유럽으로 수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개발도상국 정부가 엄격한 계약 의무를 진 반면, 제약 회사들은 약속한 물품(백신)을 적시에 납품해야 하는 최소한의 의무조차 없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제약 회사들은 계약 비밀 유지를 고집했다. 계약 비밀 유지 조항 때문에 정보를 투명하게 국민에게 공개할 수 없었다. 따라서 많은 개발도상국 정부는 국민의 생명을 구하는 일과 민주주의 가치(국민의 알권리 보장)를 보존하는 일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대안으로 떠오른 게 (글로벌 대형 제약사가 아니라) 러시아에서 백신을 공급받는 것이었다. 일부 다른 국가들의 경우에는 중국이 유일한 백신 공급원이었다.
모든 합리적인 접근 방식은 팬데믹을 통제하는 것이 모두에게 이익이라는 인식에서 시작해야 한다. 부유하고 강력한 국가들이 위기 상황에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하므로, 모든 국가에서 팬데믹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보장하고, 각국이 이를 수행하는 데 예상되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이 합리적인 대안이다. 즉, IP 공유에 동의하고, 특정 IP 사용을 부당하게 방해하는 제약 회사에 대해 엄격한 처벌 규정을 마련해야 한다.
미래의 팬데믹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관련 기술 일부를 지금부터 이전해야 하며, 향후 팬데믹이 닥칠 경우에는 각국 정부와 기업(제약 회사)이 기술의 추가 이전을 원활히 해야 한다. 정부는 관할권 내 기업이 이러한 기술을 공유하도록 강제하거나 유도할 수 있는 수단과 법적 권한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내용이 이행되지 않을 경우에는 개발도상국들이 (선진국과 글로벌 제약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권리를 가져야 한다.
팬데믹 기간 선진국들이 국제 규칙과 규범을 위반하고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개발도상국에서 백신 생산 및 의약품 개발 역량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다시 팬데믹 상황이 닥쳤을 때 선진국이 긴급 자금을 제공할 것이라고 믿을 수도 없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미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선 지금 당장 필요한 자금을 조성하고, 자금 제공을 위한 명확한 규칙을 수립해야 한다. 일부 국가가 당장 자금을 제공하지 않을 것 같더라도 국제통화기금(IMF) 같은 다자간 채널을 통해 자금을 제공하기 위한 구속력 있는 계약을 맺을 수 있다.
여기에는 대가가 있다. 미래의 병원균을 통제하려면 데이터가 필요하므로 모든 국가가 데이터 공유에 동참해야 한다. 하지만 코로나19 당시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새로운 변종 바이러스를 발견했을 때 데이터를 공유해 다른 국가들로부터 ‘제재’를 받았던 사례가 있다. 다른 국가들이 변종 바이러스가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다른 곳에서 더 널리 퍼졌는지 불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대한 여행 제한 조치를 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이 사례는 다음 팬데믹에 재앙적인 선례가 될 수 있다. 각국은 데이터 개방에 대한 인센티브를 가져야 한다.
팬데믹 당시 우리는 개발도상국 국민의 생명과 복지보다 제약 회사의 이익을 우선시했다. 이는 부도덕하며 부끄럽고, 비생산적인 일이었다. 병원균이 어디서든 곪아 터지도록 방치하는 한, 모두를 위협하는 새로운 돌연변이의 위험이 존재한다. 다음 팬데믹에는 더 정의롭고 포용적이며 합리적인 대응을 위한 무대를 마련해야 한다. 이러한 시급한 과제에 직면한 상황에서 열린 지난 9월 유엔총회 고위급 회의는 기대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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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PHEIC는 WHO가 지정하는 감염병 비상사태로, ‘국제보건규칙(IHR) 2005’에 따라 WHO 사무총장이 선포한다. WHO의 사무총장은 어떠한 질병의 유행이 심각한 수준이고, 향후 상황 예측이 불가능하며, 국경을 넘어 빠르게 확산할 위험이 있으며, 여행이나 무역을 감소시킬 우려가 생겼을 때 ‘PHEIC’를 선포할 수 있다. WHO는 회원국에 대한 감염병 예방, 감시 및 통제책을 권고할 수 있으며, 회원국에 출입국 제한을 포함한 협조도 요청할 수 있다. 그러나 WHO 권고는 회원국에 대한 법적 구속력을 갖지 않는다.
② 팬데믹행동네트워크(Pandemic Action Network)는 코로나19 위기를 종식시키고 전 세계가 감염병 발병에 대응하고 다음 팬데믹을 예방할 수 있도록, 집단행동을 추진하기 위해 2020년 4월 설립된 비정부기구(NGO)다. 시민단체, 재단, 정부, 다자간 국제기관, 오피니언 리더, 미디어 등 350개 이상의 파트너로 구성돼 있다. 다양한 전문 지식과 관점을 제공하기 위해 팬데믹 관련 뉴스레터를 제공하고, 매년 3회의 전문 보고서를 발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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