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나의 시네마 에세이 <87> 원스] 한때, 사랑했던 그 남자와 그 여자의 노래
한때, 만나고 설레고 사랑하고 헤어졌다. 떠난 사람을 미워하고 그리워하며 밤을 지새웠다. 그때 휘갈긴 낙서들, 한때 읊조리던 시는 어디로 갔을까. 잊은 줄 알았는데 한 줄기 찬바람이 그 남자의 온기를 불러온다. 무심코 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한때, 천금을 주고도 바꾸지 못할 것 같던 그 여자의 향기를 데려온다. 가슴이 시리다. 오래 잠자고 있던 질문이 깨어난다. ‘당신, 행복한가요?’ 남자는 떠난 연인을 그리워하며 곡을 쓰고 가사를 붙이고 기타를 치며 노래한다. 진공청소기 수리점을 하는 아버지를 도와 일하지만, 오후엔 유명 가수의 노래를 부르며 동전을 벌고 저녁엔 듣는 이 없어도 자작곡을 불러 젖히는 거리의 악사다.
여자는 길에서 잡지를 팔고 장미도 판다. 남의 집에서 청소도 한다. 아버지는 오케스트라 바이올리니스트였지만 관절염 때문에 연주할 수 없게 되자 자살했다. 그래도 음악적 재능을 유산으로 남겨주었다. 여자는 악기상 주인의 배려로 점심시간, 상점에서 피아노를 치며 힘겨운 삶을 잠시 잊는다.
남자와 여자가 만났다. 길을 오가며 남자의 음악을 듣던 여자는 온종일 애써 번 돈 중에서 10센트를 기꺼이 기타 케이스에 던져 넣는다. ‘겨우 10센트’를 번 남자는 실망하지만, 그의 노래가 좋다는 여자의 칭찬이 싫지는 않다.
남자가 진공청소기를 수리한다는 걸 알고 여자는 다음 날, 강아지를 산책시키듯 고장 난 청소기를 끌고 나온다. 남자가 저 먼 별나라까지 가야 한다고 해도 따라갈 태세다. 남자는 천진하게 다가오는 앳된 여자가 재미있기도 하고 귀찮기도 하다. 정말 음악이 좋아서일까. 남자는 설마 하는 생각으로 묻는다. “음악은 좀 알아요?” 그러자 여자는 자기만의 별, 악기 상점으로 그를 데려간다.
남자는 넋을 놓는다. 남자의 기타가 폭발하는 열망이라면 여자의 피아노는 고요한 재능이다. 겉모습이나 한두 마디 말로는 드러나지 않는 게 사람의 가치다. 그 사람의 매력은 어디에 숨겨져 있는 걸까. 누군가는 우연처럼, 또 누군가는 운명처럼 타인 안에 감춰진 보물을 발견하고 밤하늘 별처럼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대개는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르고 덤덤히 스쳐 지나간다.
남자는 여자와 함께 노래를 부른다. 여자는 남자의 코드를 읽고 리듬을 맞추고 화음을 넣는다. 같이 노래하는 순간, 과거의 상처가 남긴 남자의 노래는 두 사람 모두에게 마음의 길을 여는 별빛이 된다. “우린 아직 늦지 않았어요. 희망의 목소리를 높여봐요. 당신은 선택할 수 있어요. 이젠 결정할 시간이에요.”
떠난 사람을 생각하며 만든 노래가 다른 사람의 가슴에서 꽃을 피운다. 미웠던 마음, 그리웠던 마음이 설레는 마음, 새로운 인연으로 싹튼다. ‘버리는 신이 있으면 줍는 신도 있다’는 말이 있다. 떠나는 사람이 있으면 돌아오는 사람도 있다. 멀어지는 사랑이 있으면 다가오는 사랑도 있다. 어떤 이는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지만 누군가는 버려진 그 마음을 보석인 양 품고 기뻐한다.
사랑은 아닐지 모른다. 그래도 남자는 여자와 함께 있고 싶다고 말한다. 여자는 정색하고 뒷걸음질 친다. 별거 중이지만 체코 이민자인 그녀에겐 남편도 있고 아이도 있다. 사랑 때문은 아니었을지 모른다. 2년 전, 임신한 걸 알고 결혼했다. 나이 차이도 있고 성격도 맞지 않는다. 그래도 딸아이에겐 아빠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여자는 남편을 기다린다.
노래는 남자의 마음이다. 음악은 여자의 이야기다. 남자는 떠난 사람을 잊지 못해 기타를 치며 소리쳤지만, 연인은 그 노래를 들은 적 없다. 여자는 피아노를 치며 속마음을 털어놓았지만, 남편은 그녀의 연주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제 남자가 여자의 노래를 듣는다. 여자는 남자의 미완성곡에 가사를 붙여 노래를 완성한다. 마음은 자주 어긋나고 길은 곧잘 또 다른 길과 엉켜버린다. 하지만 마음의 길은 서로 연결되어 예상치 못한 곳에 인생을 데려다 놓는다.
“남편을 사랑해요?” 남자는 방금 여자에게 물어서 배운 체코어로 어설프게 질문한다. 여자는 체코어로 대답하고 해맑게 웃는다. 남자는 그녀의 말을 해석할 수 없다. 그러나 질문과 대답의 단어들을 따져보면 관객은 유추할 수 있다. 여자는 그녀의 모국어로 대답했다. “난 당신을 사랑해요.”
여자의 마음을 모른 채 남자는 떠나기로 한다. 음악에 인생을 걸어보리라, 런던행을 결심한다. 여자는 남자를 붙잡지 않는다. 기쁜 마음으로 피아노와 코러스를 맡아 데모 시디를 함께 만든다. 그래도 허전했으리라. 녹음 작업 중, 여자는 잠시 감정이 북받친다. 남자가 떠나는 게 슬펐을까? 남편과 아이를 떠나지 못하는 자신이 미웠을까?
남자는 런던에 같이 가자고 한다. 함께 음악의 꿈을 이루자고 한다. 아직 어리지만 혼자 아이를 키우며 일찍 철이 들어버린 여자는 알고 있다. 이루고 싶은 꿈이 있고 이루지 말아야 하는 꿈이 있다는 것을. 다가가도 되는 꿈이 있지만 어떤 꿈은 비눗방울처럼 손대면 사라지고 만다는 것을.
남자는 여자를 설득하지 않는다. 견고하고 뜨겁던 사랑도 시간에 마모된다는 걸 과거의 경험으로 잘 알기 때문이다. “원하는 게 있다면 전화해, 내가 바로 달려갈게.” 대신 남자는 노래한다.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인은 아닐 것이다. 남자는 여자의 인생을 지켜줄 선물을 남기고 떠난다.
2013년 ‘비긴 어게인’으로 다시 주목받았던 존 카니 감독이 2007년에 발표한 아일랜드 영화다. 아카데미 주제가상을 받은 ‘Falling slowly’를 비롯, 영화의 남녀 주인공 글렌 핸사드와 체코 출신의 마르게타 이글로바가 음악을 맡아 직접 만들고 노래했다.
‘옛날 옛날 한 옛날에’로 시작하는 동화나 전설은 아닐지라도 언젠가 인생을 돌아볼 때가 있을지 모른다. “옛날에 말이야, 한때 사랑을 했지. 그 사랑으로 하루를 버티고 그 사랑을 꺼내 보며 내일도 살아갈 힘을 냈어. 그 사랑이 나를 지켜줬지. 그래서 오늘 여기, 내가 있는 거란다. 한때 소중했던 그 사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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