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갑수의 여행이라는 꽃다발 <30> 경북 봉화] 마음은 가을빛으로 물들어…봉화 닭실마을과 만산고택
가을이 왔다. 어느새 은행잎은 노란빛으로 물들고 있다. 짧은 가을, 제대로 즐기고 싶은 분들께 경북 봉화를 권해드린다. 닭실마을을 걷고 청량산에도 올라보길. 이처럼 예쁘고 느긋한 가을이 있었나 싶을 테니 말이다.
봉화 가을 여행의 첫 코스는 닭실마을. 봉화읍에서 2㎞ 남짓 떨어진 이 마을은 풍산 류씨가 사는 안동 하회마을, 의성 김씨가 사는 안동 내앞마을,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가 함께 사는 경주 양동마을과 함께 영남 4대 길지로 손꼽히는 곳이다. 닭실마을은 충재 권벌의 종택이 있는 안동 권씨 집성촌이다. 이곳 사람들은 안동에 퇴계 이황이 있고 영주에 삼봉 정도전이 있다면 봉화에는 충재 권벌이 있다고 말한다. 우직하고 충직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충재 권벌. 그는 중종 때의 문신으로 조선 중종 2년 문과에 급제한 후 예문관검열, 홍문관수찬, 부교치, 사간원 정언 등을 역임했고 예조참판까지 올랐던 사람이다. 옳다고 생각한 것을 말함에 거침이 없었던 그는 관직에 있는 동안 두 번의 사화를 겪었고 두 번 모두 파직을 당했다.
영남 제일의 정자, 청암정
충재는 조광조와 김정국 등 기호사림들과 함께 개혁 정치에 참여했는데, 을사사화 당시에는 파직을 당하면서까지 윤임 등을 적극 구언하는 계사를 올렸던 강직한 신하였다. 충재가 닭실마을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519년 아버님의 병환을 핑계로 삼척 부사로 부임하면서다. 당시 삼척으로 가려면 봉화를 지나서 가야 했는데 충재는 부임지인 삼척으로 가면서 길지인 닭실마을과 만나게 됐다. 이후 기묘사화에 연루돼 삼척부사에서 파면되자 닭실마을로 와 500년 종가의 터를 잡았다.
충재는 거처할 집을 짓고 난 후 그 곁에 독서를 위해 한서당과 거북이 모양의 바위 위에 청암정이라는 누정을 지었다. 청암정 앞 주차장에서는 흙담과 나무 때문에 정자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별세계가 펼쳐진다. 아담한 연못이 있고 그 연못에는 붉은 단풍나무 한 그루가 눈부시게 드리워져 있다. 연못 너머 커다란 바위 위에는 방금 날개를 쳐든 모양의 팔작지붕 정자인 청암정이 올라가 있다. 바위를 생긴 그대로 이용하여 기둥을 세워 지었는데, 바위를 평평하게 다듬지 않고 기둥 길이를 조정해서 지었기 때문에 보는 위치에 따라 건물 높이가 다르게 보인다고 한다.
청암정 위에서 바라보면 무연히 서 있는 ‘충재’도 눈에 들어온다. 옛날 서당으로 쓰던 건물이다. 낡은 툇마루와 기둥, 청암정을 향해 열어젖힌 들창, 소박하고 담담하게 걸려 있는 ‘충재’ 현판들은 보는 이의 마음을 은근하게 가라앉혀 준다.
충재는 유교적 이상사회를 만들려다 실패한 인물이다. 그래서 이곳에 도망치듯 내려와 정자를 지은 것이다. 원래 누(樓) 형태의 정자는 사방이 환하게 틔어 있지만 청암정은 나무를 심어 외부를 가렸다. 이는 자기의 뜻을 몰라주는 세상으로부터 격리되고 싶었던 충재의 뜻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 어쨌든 막상 정자가 있는 바위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면 피안의 세계에라도 온 듯 아연 저편 세상이 막막하고 아득하기만 하다.
유유자적 가을 산책, 닭실마을
청암정에서 나와 닭실마을로 향한다. 닭실마을은 야트막한 산이 병풍처럼 마을 뒤편을 두르고 있으며 앞으로는 개천이 휘감아 돌면서 너른 들판을 펼쳐 놓고 있는 마을이다. 들판 쪽에서 마을을 바라보면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금계포란’의 형국이라고 해서 일찍이 ‘닭실’이란 이름을 얻었다. 일제가 봉화의 춘양목을 수탈하기 위해 철길을 놓을 때, 그들은 곧은길 대신 마을 앞을 휘돌아 나가는 길을 택했다. 지네의 형상을 한 철길로 닭실마을의 정기를 꺾기 위해서였다.
닭실마을이지만 현지인들은 ‘달실’이라 더 많이 부른다. 사실 최근에 만들어지고 있는 홍보 자료에는 ‘달실’마을이라고 적혀 있지만 수년 전까지만 해도 ‘닭실’마을이라고 불렸었다. 경상도 방언에서는 ‘닭 모양의 마을’을 달실이라고 부른다.
마을은 느긋한 걸음으로 돌아보기 좋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를 들으며 걷는 마음은 한없이 여유롭기만 하다. 멀리 보이는 모양새까지 제대로 갖춘 기와집들은 고향 집에라도 온 양 푸근하기만 하다. 높지도 낮지도 않게 구불거리며 흘러가는 흙돌담길, 담 밖으로 기웃이 고개를 내민 감나무 가지 등등 모든 풍경이 어여쁘고 넉넉하다.
닭실마을에서 유명한 것은 한과다. 충재 종택이 터를 잡고 제사를 모시면서부터 한과를 만들기 시작해 500여 년 동안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기품 있는 가을과 만나다, 만산고택
봉화에는 가을의 운치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한옥도 있다. 춘양면 의양리에 자리한 만산고택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인 만산(晩山) 강용(姜鎔ㆍ1846~1934) 선생이 고종 15년(1878)에 지었다. 대한제국의 통정대부 중추원 의관을 역임한 만산은 일제에 의해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내려와 국운의 회복을 기원하며 지냈던 사람이다.
문수산과 낙동강의 첫 번째 지류인 운곡천을 배산임수 삼아 들어선 만산고택은 전형적인 사대부 집안의 가옥구조를 보여준다. 방문객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건 11칸의 긴 행랑채 중앙에 우뚝 솟은 솟을대문이다. 솟을대문은 정 3품 당상관 이상의 벼슬을 해야 가질 수 있다. 다시 말해 임금님이 계시는 근정전에 올라가서 정사를 논할 수 있는 반열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펼쳐진다. 조선시대로 시간여행을 온 듯하다. 마당 건너편에 ‘ㅁ’ 자형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이어져 있고 왼편엔 공부방인 2칸짜리 소박한 서실이 있다.
오른편으로는 따로 담을 두르고 문을 낸 별당 ‘칠류헌(七柳軒)’이 고풍스럽게 서 있다. ‘ㅁ’ 자 구조는 겨울철 추위를 막아주며 집의 안정감을 높여주는 기능이 있다고 한다.
얼핏 보기에도 정갈한 사랑채 처마 밑엔 각각 ‘만산(晩山)’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만산’은 대원군이 직접 쓴 글씨인데 지금은 서울의 한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현재 걸려 있는 건 탁본이다. 만산은 대원군과 친분이 돈독했다고 한다.
사랑채에는 이것 말고도 현판이 세 개가 더 있다. 만산 현판 왼쪽으로 ‘靖窩(정와)’ ‘存養齋(존양재)’ ‘此君軒(차군헌)’이 나란히 있다. ‘정와’는 당시 뛰어난 서예가 강벽원 선생이 썼다. ‘조용하고 온화한 집’이라는 뜻이다. ‘존양’은 ‘본심을 잃지 않도록 착한 마음을 기른다’란 의미, ‘차군헌’은 조선 후기 서예가인 권동수의 글로 ‘차군’은 대나무를 예스럽게 부르는 말이다.
사랑채 옆에 자리한 서실은 후손들의 공부방 용도로 지은 것이다. 네 곳의 추녀마루가 동마루에 몰려 네 면 모두가 지붕면을 이루는 ‘우진각 지붕’이 특이하다. 지붕 밑에는 어김없이 ‘한묵청연(翰墨淸緣)’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고아한 학문을 닦는 곳’이라는 뜻인데, 영친왕이 8세 때 쓴 글씨라고 하니 놀랍다.
고택에서는 하룻밤 묵어볼 것을 권해드린다. 컴퓨터도 없고 TV도 없다. 밤이면 사위가 잠잠해진다. 툇마루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본다. 어두운 하늘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 별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의 잡사는 내 알 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청량산에서 만나는 만추
봉화 여행의 마지막 코스는 청량산이다. 봉화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산이다. 바위 봉우리와 기암절벽이 어우러져 절경을 빚어낸다.
퇴계 이황 선생이 중국의 무이산에 비유하여 ‘조선의 무이산’이라 칭하며 주자학의 성지로 칭송하던 명산이다.
어풍대에서 청량산을 바라본다. 울긋불긋한 단풍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봉화에 와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가을을 만난 듯하다.
여행수첩
먹거리 봉화 읍내의 솔봉이는 송이버섯 돌솥한정식으로 유명하다. 가을 산에서 채취한 송이를 급속 냉동해 송이 향이 살아있다. 송이버섯을 먼저 먹은 후 돌솥밥은 산나물에 비벼 먹는다.
매호유원지와 봉화읍 중간쯤에 위치한 봉성은 돼지숯불구이로 유명한 마을이다. 소나무 숯불에 굵은소금으로 간을 해 구워내는 돼지고기는 기름이 빠져 쫄깃쫄깃하고 담백한 맛을 자랑한다. 솔잎 위에 고기를 얹었을 뿐인데 솔향이 제법 진하게 밴다. 청봉숯불구이를 비롯해 8개 음식점이 옛날 장터에서 성업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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