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나니 온몸 굳고, 말 안 나와”…잘나가던 男의 선택은 [씨네프레소]
박창영 기자(hanyeahwest@mk.co.kr) 2023. 10. 23. 18:12
[씨네프레소-98] 영화 ‘잠수종과 나비’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어느 날 깨어나 보니 온몸이 굳어 있었다. 말도 나오지 않았다. 움직이는 거라곤 왼쪽 눈꺼풀과 눈동자밖에 없었다. 심각한 상황이란 건 자기 앞에 있는 사람들이 온통 의료진임을 보고 알았다.
그는 잠금증후군(locked-in syndrome) 상태에 놓였다. 의식은 그대로지만 전신마비로 몸을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없는 상태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프랑스 엘르 편집장으로 잘 나가던 남자는 자신의 상황에 고함을 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명을 지르지도 울지도 못하는 게 그가 처한 상황이었다. 자기 몸에 감금돼버린 것이다.
프랑스 엘르 편집장, 자기 몸에 갇혀버리다
‘잠수종과 나비’(2008)는 장 도미니크 보비의 실화를 담은 영화다. 그는 자기 몸에 갇히기 전까지 잘 나가던 남자였다. 패션 업계에 대한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선망해봤을 엘르의 편집장이었다. 화보 촬영장과 패션 산업의 중심지를 누비는 화려한 삶이었다. 아이들과 시간도 나름 잘 보냈다. 뇌졸중으로 쓰러지던 그날에도 아들과 차를 타고 이동 중이었다.
갑자기 희귀병에 걸려버린 그는 기억 저 아래쪽으로 잠수하게 됐다. 어린 시절의 온갖 꿈과 화려했던 청년기, 가족과 친구에게 상처를 줬던 기억 사이를 헤엄쳤다.
어쩌면 그렇게 기억 속으로 가라앉고 싶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보비의 주변엔 사람이 있었다. 언어치료사는 그가 음성언어 없이 소통할 수 있도록 도왔다. 치료사가 알파벳을 하나씩 얘기해주면 그가 눈을 깜빡여 단어를 완성하도록 한 것이다. 이를테면, M, E, R, C, I에서 각각 눈을 깜빡임으로써 ‘고맙다(merci)’는 단어를 만드는 식이다. 물리치료사는 그가 음식을 삼키는 훈련을 하도록 도왔고, 가족과 친구들은 병원을 찾아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실제로 범죄자에게 납치돼서 수년간 감금을 당했다가 풀려난 적이 있었던 그의 지인은 자기 경험을 전했다. “폭력보다 더 큰 고통은 기약 없는 기다림이었어요. 그래도 살아남았죠. 인간으로서의 나를 포기하지 않았거든요.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어요. 보비 씨도 그렇게 하셔야 해요.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절대 포기하면 안 돼요. 그러면 이겨낼 수 있을 거예요.”
20만번의 눈 깜빡임으로 완성한 책 한 권 … 베스트셀러가 되다
주변에 자신을 돕는 사람이 이토록 많다는 사실은 그에게 새 꿈을 불어넣는다. 책을 한 권 집필해보겠단 마음을 먹게 된 것이다. 사고를 당하기 전 출판 계약을 맺어둔 출판사에 언어치료사 도움을 받아 연락했다. 자기 말을 받아 적어줄 대필 작가를 찾아 알파벳 하나씩 기록해나갔다. 홀로 있을 때, 챕터를 구성한 다음, 대필자가 왔을 때 눈의 깜빡임으로 받아적게 하는 식이다.
20만번의 깜빡임으로 완성된 책 한권은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러나 보비는 자기 책이 그토록 잘 팔렸단 사실은 알지 못했다. 책이 출간된 지 열흘 후인 1997년 3월 9일 사망했기 때문이다. 보비는 책 한권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한계를 훨씬 넘어서는 에너지를 끌어 썼던 것일까.
무거운 인생, 하지만 경쾌하게 바라보려 했다
카메라는 그의 한 쪽 눈으로 본 세상을 보여주다가, 거리를 떨어뜨려 그와 주변 사람들이 함께 있는 모습을 비추는 것을 반복한다. 화가이기도 한 줄리안 슈나벨 감독은 그의 작은 병실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햇살을 따뜻하게 포착한다. 어떤 상황이라도 보는 방식에 따라 아름다울 수 있단 것을 말해주는 듯한 연출이다. 유머러스한 자세로 살아갔던 보비의 삶과도 연결된다.
영화는 인생의 불가해성을 생각해보게 한다. 세상에는 아마도 잠금증후군이라는 증상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로 죽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보비는 당사자가 됨으로써 잠금증후군을 알게 됐다. 그 역시 모른 채로 살다가 떠나고 싶었을 것이다. 그걸 몰라도 되는 삶이라면 얼마나 행복했을지 몇 번이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보비는 눈 깜빡임으로 책 한권을 남겼다. 그 책은 수많은 사람에게 위로를 줬다. 영화로까지 만들어져 길이 남을 명작 반열에 올랐다. 아마도 오래 전해질 것이다. 많은 이에게 위로를 줄 유산을 남기는 삶은 흔치 않다. 실제로는 자기 주위의 단 한 사람에게 위로를 주는 삶도 쉽지 않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을 겪은 뒤 우리 인생엔 여러 제약이 생기기도 한다. 이 영화는 삶의 미스터리를 풀어보려 애쓰면서, 한편으론 그 한계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했던 남자의 이야기다. 육신에 잠겨 있는 가운데 저자가 한 글자씩 찾아나간 다음의 문장을 공유하며 마무리짓는다. “목욕할 때와 마찬가지로 내 낡은 조끼를 입을 때면 여러 가지 추억이 고통스럽게 내 기억을 되살린다. 그렇지만 나는 이러한 현상을 계속되는 삶의 상징으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고집스럽게 나 자신이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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