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허청 기술탈취 종합정책] 한국형증거수집제도 등 도입…처벌 수위 높이고 부처간 공조 강화
최근 국내기업 간 일어나고 있는 기술탈취 분쟁은 개별 기업 피해를 넘어 우리나라 기술혁신 생태계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경고다. 천연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는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훌륭한 기술이 끊임없이 개발되고 보상받는 선순환 구조가 필수적이다. 기술탈취 피해는 이러한 구조 자체를 위협할 수 있다. 기술을 새로 개발하기보다 베끼기가 만연하게 되는 상황은 우리 산업의 경쟁력 저하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특허청은 국내외 기술탈취 방지를 위해 종합정책을 추진한다. 기술보호 강화를 위해 부정경쟁방지법을 종합적으로 개정하는 일명 '기술탈취 방지법' 통과를 적극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전문브로커 행위 근절…국내 재취업 기회 제공
특허청 조사에 따르면 국내나 해외로 영업비밀이 유출되는 피해는 퇴직자에 의한 유출이 절반(51.2%)이고, 재직자에 의한 유출도 26.4%에 달했다. 영업비밀 유출 대부분이 외부인(24%)이 아닌 내부인에 의한 것으로 드러났다.
시장에서 정상적인 헤드헌팅 활동이 아닌 영업비밀 유출을 알선하는 브로커 행위에 대해 엄벌을 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현재 부정경쟁방지법 상으로는 영업비밀의 부정 취득·사용·누설만 처벌하고 있어 이직 알선행위를 공범행위로 처벌하는 데 한계가 있다.
특허청은 영업비밀 침해를 알선하는 행위를 부정경쟁방지법상 영업비밀 침해행위의 한 유형으로 포함시키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인력을 통한 기술유출은 통상 경쟁사에 의한 조직적 범죄에 해당할 가능성이 높다. 특허청은 조직적인 영업비밀 유출 시도를 억제하기 위해 법인에 대해 자연인의 3배에 달하는 벌금을 부과할 계획이다.
해외로 기술인력이 유출되며 발생하는 기술탈취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국내에서 계속해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 직업선택의 자유가 있기 때문에 기술유출을 막자고 개개인의 해외 취업을 과도하게 제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현재 기업에서 고경력 연구인력의 정년을 연장하거나 국내에서 재취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방법이 거론되고 있다.
실제 특허청은 반도체 분야 핵심 연구 인력의 해외이직을 방지하는 동시에 신속·정확한 특허심사를 제공하기 위해 올해 반도체 민간 전문가를 특허심사관으로 채용해 세계 최초로 반도체 전담 심사조직을 출범시키기도 했다.
◇'일벌백계' 솜방망이 처벌 그만
기술유출 시도를 최소화하기 위해 보다 강력한 처벌이 이뤄질 필요가 있다. 기술유출로 얻을 수 있는 이득에 비해 지나치게 약한 솜방망이 처벌로는 기술유출을 부추길 뿐이며, 오히려 일벌백계해 범죄행위에 경각심을 갖게 해야한다.
특허청이 2017~2019년 영업비밀 사건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 영업비밀 침해범죄에 대한 유죄판결(자유형) 중 98%가 2년 이하 징역이고, 집행유예율도 75.3%(1심 기준)에 이르렀다.
2015년부터 8년간 기술유출 관련 범죄로 1심 유죄를 선고받은 496명 중 실형을 받은 사람은 73명에 불과하다. 실형 평균 형량도 12개월 수준이라는 대검찰청 연구용역 결과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에 특허청은 2019년에 이미 영업비밀 침해죄 법정형을 국내유출 최대 10년, 해외유출 최대 15년으로 강화한 바 있다. 이번에 추진하는 '기술탈취 방지법'에서는 영업비밀 침해품에 대한 몰수·추징 규정을 신설해 처벌을 보다 강화하고, 제조시설에 대해 해당 법규를 적용가능토록해 2차 피해까지 방지한다는 복안이다.
또 기술유출을 국내단계에서 억제하기 위해 지나치게 낮게 설정된 국내유출 벌금형을 현행 5억원 이하에서 10억원 이하로 2배 강화할 계획이다.
전문가들은 기술유출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문제에 있어 가장 시급한 선결과제로 법원의 양형기준 정비를 꼽는다. 양형기준은 법관이 형량 및 집행유예 여부 결정 시 참고하는 기준이다. 그동안 부정경쟁방지법 개정 등 기술유출 범죄에 대한 법정형 상향은 꾸준히 이뤄진 만큼 권고 형량범위 등 양형기준 정비도 필요하다.
정부도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대응에 나서고 있다. 양형위원회에 영업비밀 침해범죄 양형기준 정비를 지속적으로 제안해온 특허청의 경우 제9기 양형위원회가 새로 출범한 올해 대검찰청과 협력을 강화하는 등 보다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지난 6월 양형위원회 발표에 따르면 지식재산권범죄 양형기준이 총 7개 정비대상 범죄군에 포함됐다. 영업비밀 국외누설 등에 관한 법정형 상향 등 법률 개정을 반영한다는 취지다.
지식재산권범죄 양형기준은 7개 범죄군 중 가장 먼저 논의되는데 내년 3월이면 최종 의결돼 시행일 이후 공소되는 사건부터 사법현장에 적용될 예정이다.
기술유출 범죄에 있어 피해액 산정이 어렵다는 점도 처벌을 약하게 만들고 제대로 된 손해배상이 이뤄지지 않도록 하는 주요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영업비밀은 비공개 기술로 시장 가치평가 등을 통한 피해액 입증도 쉽지 않다. 양형은 결국 피해의 정도(피해액)에 의해 결정되는데 이러한 피해액 자체가 산정되기 어렵다보니 강력한 처벌도 요원한 상황이다.
최근 관계부처들도 피해액 산정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행동에 나섰다. 대검찰청은 지난 6월 '기술유출 피해금액 산정 등에 관한 연구' 용역과제를 발주했으며, 특허청도 관련 연구를 위한 태스크포스(TF) 구성 등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한국형증거수집제도 도입
기술보호 글로벌 표준 제도인 특허제도를 강화해 기술탈취로부터 정당한 권리자 보호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는 인구 10만명당 특허 출원 건수가 세계 2위인 특허강국이나, 정작 특허권을 이용한 권리행사는 매우 어려운 국가로 알려져 있다. 특허와 영업비밀 소송 승소율은 7.5~7.7% 수준으로, 일반 민사소송(54.8%) 대비 턱없이 낮아 10명 중 1명도 못 이기는 실정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우리 기업 간 소송도 특허와 영업비밀 보호가 강하다고 알려진 미국 법정에서 진행되는 경우가 상당수다.
전문가들은 원정소송이 벌어지는 원인으로 주요국에서 운영 중인 증거수집제도를 지목한다. 특허권자 보호가 강하다고 알려진 미국의 경우 당사자 간 증거를 폭넓게 교환토록 하는 '디스커버리' 제도가 권리자 보호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법원이 침해자(피고)에게 자료제출을 명령할 수 있는 제도 정도만 운영하고 있어 명령을 받은 당사자가 자료의 소지를 부인하거나, 인멸·훼손·허위제출 할 경우 이를 확인할 수 없는 한계가 존재한다.
특허청은 이러한 특허침해소송에 있어 증거수집의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한국형 증거수집제도' 도입을 추진 중이다. 자료의 은닉·허위 제출을 확인하는 전문가 사실조사, 증언녹취 및 증거 멸실·훼손 방지를 위한 자료보전명령 도입을 주요 골자로 하고 있다.
관련 특허법 개정안은 이미 2020년, 2021년에 발의돼 현재 산자위에 계류 중인 상황이다. 법조계나 업계에 미치는 파장이 워낙 큰 법안이다 보니 특허청이 2020년부터 20여개 협·단체를 대상으로 약 80회의 의견수렴을 진행했다. 2021년 국회 공청회, 지난 9월 국회 토론회 등 우리나라 상황에 가장 적합한 제도를 도입하기 위한 작업이 진행 중이다.
◇영업비밀 해외유출 신고포상금제 추진
기술유출범죄는 치밀하게 계획돼 은밀히 진행되기 때문에 범죄행위 포착이 어려운 암수범죄가 대부분이다. 그나마 보안 시스템이 갖춰진 기업이나 비정상적 자료반출 등 전산기록을 통해 단서를 잡을 수 있다.
기업이 단서를 포착하더라도 신고나 소송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도 많다. 영업비밀이 유출됐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고객사나 투자자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여러 기업의 협업이 필요한 첨단기술의 경우 상대방 영업비밀도 공유하는 경우가 많아, 이러한 유출피해는 기업 신뢰도 저하로 이어져 거래관계까지 위험해지기도 한다.
특허청은 신고 활성화를 위해 영업비밀 해외유출 신고 시 포상금을 지급할 수 있는 법적근거 마련에 들어갔다. 현재 부정경쟁방지법 상 위조상품에 대한 신고 포상금제도만 근거 규정이 마련돼 있는데 기술유출 범죄 중요도를 생각할 때 영업비밀 해외유출에 대한 신고 활성화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기술탈취는 소수에 의해 은밀히 진행되는 경우가 많아 범죄에 연루된 내부자 신고가 범죄행위 포착과 혐의 입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를 활성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내부고발자 형량 감경도 고려해봐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특허청과 대검이 지난 5월 공동으로 개최한 양형기준 정비 세미나에서 내부고발을 감경요소로 추가하는 방안을 논의한 바 있으며, 수정 심의 과정에서도 이에 대한 부분이 검토될 것으로 보인다.
◇기술탈취 분쟁 신속해결 '원스톱체계' 구축
특허청은 기술탈취 사건 해결을 위한 다양한 기능을 수행 중이다. 특허·영업비밀·디자인 범죄를 전문적으로 수사하는 '기술경찰' 운영부터 아이디어 탈취 등 부정경쟁행위 행정조사, 산업재산권(특허·상표·디자인)·영업비밀·부정경쟁행위에 대한 분쟁조정까지 수행하고 있다.
최근 이러한 3가지 기능들을 한데 엮어 '원스톱 분쟁해결 체계'를 구축 중이다. 3가지 기능을 모두 수행하는 유일한 정부부처라는 장점을 이용해 보다 신속한 기술탈취 피해구제 수단을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기술경찰 수사와 행정조사 건 중 당사자 간 합의 의사가 있는 경우 신속히 분쟁조정으로 연계하고, 반대로 분쟁조정 사건 중 의도적으로 조정에 불응할 경우 수사·조사로 연계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상호간 조사 자료를 이관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전담 지원기구 '분쟁해결 종합지원센터' 신설도 추진할 계획이다.
기술탈취 행정조사·분쟁조정 각각의 기능도 강화해나갈 계획이다. 아이디어 탈취 등 부정경쟁행위 행정조사 실효성을 강화하기 위해 기존 시정권고·미이행 시 공표 제도를 넘어 시정명령·과태료 부과까지 가능하도록 법령을 정비한다.
행정조사 자료가 소송에서 활용되지 못해 패소하는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법원에 조사 자료를 송부할 수 있는 법적근거도 마련할 계획이다.
특허청은 앞으로 보다 많은 사건이 분쟁조정을 통해 해결될 수 있도록 법원·검찰·경찰 등 유관기관의 지식재산권 관련 사건을 조정 절차로 연계하는 협력관계를 확대해 나갈 방침이다. 현재 65% 수준의 분쟁조정 성립률을 높이기 위해 특허청 기술전문가 현장조사 근거도 마련할 계획이다.
한무경 국회의원은 법안 발의 배경에 대해 “피해 기업은 대부분 중소기업으로 대기업에 맞설 자금과 전문성이 열악하다”며 “특허청 기술 전문성을 활용해 신속하게 해결되도록 원스톱 지원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부처간 공조·특허 빅데이터 활용 강화
기술탈취가 국가안보 차원 문제로 급부상하면서 국내에도 이러한 공조체계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올해 2월 미국 정부는 적성국 기술탈취에 대응하기 위해 '혁신기술 기동타격단'을 출범했다. 법무부·상무부가 공동 지휘하고 수사기관(FBI, HSI)과 검찰청이 참여하는 일종의 관계기관 공조체계다.
기술탈취 범죄에 대응하는 공조체계로 국정원, 특허청, 검찰청의 삼각 공조체계가 있다. 정보기관인 국정원에서 기술유출 첩보를 입수해 특허청 기술경찰에 공유하면 기술경찰에서 본격 수사를 수행한다. 수사가 끝나면 그 결과를 검찰로 송치하고, 검찰에서 최종 판단을 거쳐 범죄자를 법원에 기소하는 역할을 한다.
특허청은 이러한 부처간 공조체계를 더욱 강화시킬 계획이다. 특허심사·심판이라는 고도의 기술전문성을 요하는 업무를 수행하고 있어 정원 1800여명 중 절반인 900여명이 박사학위 및 전문자격 보유자로 구성돼 있다.
부처간 공조로 이러한 기술전문성을 최대한 활용할 경우 해외 기술탈취 사건에 효과적으로 대응 가능하다는 판단이다.
해외 기술탈취에 효과적 대응을 위해 경쟁국과 우리나라의 기술지도를 그려볼 수 있는 특허 빅데이터를 적극 활용할 필요도 있다. 기술 80%가 특허로 공개되고, 그 중 75%는 특허문헌에만 공개된다는 연구결과가 있을 정도로 특허문헌은 기술정보의 집약체다. 국제적으로 표준화된 기술분류체계로 정리돼 있어 분석 데이터로 활용성도 높다.
특허청은 다양한 특허분석 경험으로 특허정보를 활용하면 어디가 우리 주력산업의 경쟁국가 혹은 경쟁사이며, 이들이 우리기업의 어떤 기술을 노릴 가능성이 큰 지도 도출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전세계 5억3000만여건에 이르는 특허 빅데이터를 보유하고 있는 만큼 이에 대한 활용을 강화하기 위한 법적 근거 '산업재산정보활용촉진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양승민 기자 sm104y@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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