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산골로 뛰어 내려와 나무 한 그루 되다
그는 뛰어내리는 사람이다. 울산 울주군 상북면 소호리 소호분교에서 500년 된 느티나무를 본 2004년 1월, 김미진(53) 울산마을교육공동체거점센터 땡땡(○○)마을 운영실장은 도시에서 ‘뛰어내렸다’. 큰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이었다. “이런 나무 그늘 아래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부모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겠다 싶었어요.” 울산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보름 만에 폐가를 수리해 산골 소호마을로 이사 왔다. 6년 뒤엔 초등학교 교사라는 정규직에서도 뛰어내렸다. “뭣 모르고 하는 짓, 저는 그게 답인 거 같아요. 알면 못해.”
23살부터 73살까지 마을교사 33명
느티나무로 점프하고 17년 뒤, 2021년 11월11일 그는 따뜻한 가래떡을 쥐고 있다. 아이들, 교육감, 주민 모두 빙 둘러 두 ‘다라이’ 길이 긴 가래떡을 함께 들었다. 코로나19 탓에 개관식을 치르지 못한 땡땡마을의 첫돌이었다. “보통 대표들만 가위로 리본을 자르잖아요. 둥글게 선 가래떡 커팅식에선 모두가 평등해요. 따뜻하고 바로 먹을 수 있고 쓰레기도 안 나와요.” 가래떡을 만들 쌀은 동네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았다.
2016년 폐교한 궁근정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해 연 땡땡마을은 이런 곳이다. 운동장엔 각자 자기 뜻대로 가꾼 손바닥 정원이 모여 큰 정원을 이룬다. 누구나 선생님이자 학생이 될 수 있다. 몸놀이터(요가), 흙놀이터(도예), 나무놀이터(목공), 요리놀이터 등이 평일엔 밤 9시까지 문을 연다. 아이들은 공짜, 어른은 재료비만 낸다. 23살부터 73살까지 마을교사 33명 가운데 절반은 상북면 주민이다.
2023년 9월26일 오전 ‘옛날옛적애(愛)교실’, 체크무늬 벙거지를 쓴 ‘할배쌤’ 성낙모 마을교사는 붓글씨를 연습했던 화선지를 재활용해 아이들과 제기를 만들었다. 아이들 재밌으라고 이 모자는 꼭 쓰고 온다. 가지산 쌀바위 전설 같은 얘기도 들려준다. “어느 날, 할배쌤 수업을 봤는데 뭉클한 거예요. ‘너는 이름이 뭐고?’ ‘그래 그 뜻이 뭐고?’ ‘진짜 좋은 이름이구나. 우주의 참 좋은 기운으로 네가 이렇게 왔구나. 그 기운이 네 이름에 다 담겨 있구나.’ 아이 한명, 한명 모두에게요.”
같은 시각 ‘할매쌤’ 이미해 마을교사는 아이들 대여섯 명과 깍두기를 버무렸다. 처음에 할매쌤은 “김치 담그는 거로 어떻게 선생님이 되냐”며 안 한다고 했다. “제가 아무한테나 하자고 안 합니다. 제가 지켜봤습니다.” 할매쌤, 할배쌤 모두 김미진 실장이 꼬셨다. “다양한 세대가 마주치고 서로 묻고 가르쳐주는 그 자체가 교육이죠.” 마을교사는 매년 1월에 뽑혀 2월에 기본교육을 받는다. 강사비는 시간당 4만원이다. “큰돈은 아니지만 시골에서 이 정도 고정 수입을 낼 수 있는 일자리를 만든다는 게 귀했어요.”
‘누구나 ○○교실’을 열고 싶으면 그냥 손 들면 된다. 한 초등학교 4학년과 6학년 여자아이가 ‘음악 줄넘기 교실’을 열고 싶다고 했다. 단, 수강생이 자기보다 어렸으면 좋겠다는 조건을 달았다. 수강생 수가 셋 이하면 폐강인데 1학년 2명, 3학년 2명 등 4명이 모였다. 진지했다. 이 수업은 시작하자마자 실전이다. 바로 줄넘기를 돌렸다. “선생님의 자세가 돼 있더라고요. 둘이 옷도 맞춰 입으시고 준비를 많이 해오셨더라고요. 잘하는 아이한테 사탕도 탁 하나 주시고. 감동받았어요.” 사실, 김 실장은 쉽게 감동한다. 뜨개질 교실을 연 동네 언니가 코 하나하나 손으로 그려 지도안을 만든 걸 보고 뭉클했다. “감동이야, 감동.”
“여기 오면 숨통이 트여요”
청소년자치배움터는 아이들이 배우고 싶은 걸 스스로 정한다. “아이들이 땡다방을 열어 음료를 팔아보고 싶다 하더라고요. 토요일 오후에 하겠다고 해요. 오전에 하면 손님이 더 많을 텐데 그렇게 일찍 못 일어나겠대요. 나중엔 강매하려고 해서 안 사줬어요. 쉽게 돈 벌 수 있는 게 아님을 알려줘야죠. 그러다 영업 잘하는 친구도 나오더라고요.”
이곳엔 반딧불이와 꼬리명주나비가 살고 귀제비가 찾아온다. 창고를 개조한 반딧불이생태교실, 2023년 9월25일 오후, 김강수 마을교사(별빛반딧불이복원연구회 회장)가 대여섯 개 수조에 사는 애반딧불이 애벌레를 보여줬다. “8천 마리 있어요.” 작은 코딱지 같은데 노란 티셔츠를 입은 그는 잘도 찾아낸다.
6월 초여름 밤, 깜박깜박 빛을 내는 애반딧불이는 이제 자연 상태에선 거의 볼 수 없다. 애반딧불이 애벌레는 냇가 촉촉한 땅에 땅콩 모양 집을 짓고 그 안에서 변태하는데 그런 땅을 찾기 힘들다. 물길은 직선화되고 제방이 섰다. 애벌레는 다슬기를 독침으로 쏴서 녹여 먹는다. 아기 애벌레는 작은 다슬기를 찾아야 한다. 자연 상태에선 문제없지만 이곳에선 김 마을교사가 일일이 다슬기를 쪼개준다. 그러면 물이 쉽게 오염되니 수조 물을 계속 갈아줘야 한다. 생태교실에서 아이들은 애반딧불이의 생애를 관찰한다. 애벌레를 채집해 땡땡마을 뒤 냇가로 돌려보내는데, 생존율은 3%대다. 그러면서 태화강 상류 생태도 배운다. “6월에 애반딧불이 빛을 보고 아이들이 와~ 하죠.”
아이들은 봄에 쥐방울덩굴도 심는다. 꼬리명주나비는 쥐방울덩굴만 먹는데 이 식물도 사라지고 있다. 이 나비들은 식욕이 대단하다. 땡땡마을 한 귀퉁이 덩굴줄기는 뼈만 남았다. 토실토실한 애벌레들은 봄이 오면 호랑무늬 나비로 날아갈 거다. “곤충 한 마리가 얼마나 소중한지, 반딧불이가 얼마나 예쁜지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자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느끼면 함부로 대하지 못해요.”(김강수 마을교사)
땡땡마을은 인기가 있다. 울산 여러 학교에서 찾아온다. 마을 사람들은 수시로 들른다. 2022년 누적 방문객 수는 3만 명, 2023년 9월 말까지는 3만2천여 명이다. 2021년 국무조정실이 주관한 ‘생활SOC 공모전’에서 대상도 받았다. 김 실장은 한 아이의 말에 감동받았다. “여기 오면 숨통이 트여요.”
2016년 궁근정초등학교가 85년 긴 역사를 끝내며 마지막 졸업식을 하던 날, 김미진 실장은 졸업식장 뒤쪽에서 울었다. “여기 졸업생이세요?” 아니다. “아이가 졸업하나요?” 아니다. 그는 이 초등학교와 아무 관계가 없지만, 또 관계가 있다. 상북면 주민이다. 상북면 3개 초등학교가 통폐합되는 데 그는 반대했다. “옛날엔 학교가 마을의 구심점이었거든요. 학교가 없으면 젊은 사람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시골로 오겠어요? 살던 사람들도 나가지요.”
의원실 찾아다니며 지킨 풀뿌리 예산
궁근정초등학교는 폐교 뒤 2년간 다담은갤러리로 운영됐지만 마을과는 분리된 섬이었다. 그사이 그를 비롯한 주민, 교사 등이 ‘상북마을교육공동체 판’을 꾸렸다. 상북중학교를 살리려고 모인 사람들이다. 사립이던 상북중은 당시 기피 학교였다. “농촌 교육은 보통 중학교부터 무너져요. ‘상북중 보내면 아 똥통 된다’고들 했어요. 여기 남는 아이들은 ‘루저’가 되는 건가요? 아이들 자존감이 어떻게 되겠어요.”
김 실장은 초등학교 6학년 학부모들을 만나 어떻게 하면 아이를 상북중에 보내겠냐고 물었다. 토론회도 열었다. “좋은 학교 찾아가지 말고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를 더 좋은 학교로 만들자고 의기투합한 거죠.” 2020년 상북중은 공립 혁신중학교가 됐다. 아이들이 다시 늘었다.
‘폐교된 궁근정초등학교를 마을교육공동체 거점 공간으로 만들자.’ 고 노옥희 전 울산교육감과 ‘마을교육공동체 판’ 등 상북면 풀뿌리 활동의 뜻이 맞았다. 교육청이 추진 전담팀(TF)을 꾸렸고, 그가 팀장을 맡았다. 민과 관이 뭉쳐도 실현은 쉽지 않았다. 시의회가 반대했다. “주민도 별로 없는 시골에 왜 이런 돈을 투자하냐는 거예요. 예산 낭비라고요.”
김 실장은 마을 사람들 서명을 끌어모아 의원실 문을 하나씩 두드렸다. “사람 없으니 투자 안 하고 투자 안 하니 사람 더 빠져나가고 악순환인데 그 고리를 끊어야죠. 안 그러면 시골은 골로 가요. 그 사람들 다 도시로 갈 텐데 거긴 또 사람이 너무 많아 문제잖아요.” 예산은 살아남았다. 개관준비추진단에는 청소년, 교사, 교육청, 주민 등이 들어왔다. “추진단에 들어온 아이들이 센터 이름에 ‘학교’가 안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별칭이 땡땡마을이 됐어요.”
땡땡마을이 문을 열기 10년 전인 2010년 그는 교직을 떠났다. “월급쟁이로 살지 않으면 굶어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있었어요. 그런데 소호마을에서 살다보니 ‘어떻게든 살아지겠구나’ 싶었어요. 저는 행복한 선생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행복한 교실을 이끌어가리라고. 그런데 학교 교육의 핵심 목표는 체제 순응형 인간을 기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숨이 막히더라고요. 그냥 뛰어내린 거예요, 대책 없이.” 그해 그는 난생처음 농사를 지었다. “사람 땀구멍에서 그렇게 땀을 흘릴 수 있다는 걸 보고 정말 놀랐어요.” 가지, 오이, 토마토, 고추를 심었는데 그 농사로 번 수익은 1만원이다.
홈스쿨링 아니라 마을뒹굴링
오이는 잘못 길렀던 그는 아이는 잘 길렀다. 이듬해 도시 아이들의 ‘이모’가 됐다. 소호마을 산촌유학프로그램에 참여해 도시 아이 두세 명을 맡아 함께 살았다. “첫해엔 안 한다고 했어요. 교사는 오후 5시까지만 아이들 가르쳐도 힘든데 어떻게 같이 사냐고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 저게 교육이구나 싶은 거예요. 사람과 사람, 삶과 삶이 만나더라고요. ‘사회적 가족’이 되는 거예요. ‘이모’를 도와 농사도 짓고 친구랑 여행도 가고.”
산촌유학을 시작할 때만 해도 뒷말이 많았다. 토박이 주민들은 소외감을 느끼기도 했다. “지금은 ‘느그들이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알겠다’고 하세요.” 소호분교는 폐교 위기를 면했고 소호마을 인구가 늘었다. 토박이 주민들의 아이들은 어른이 됐고 귀촌 가정이 빈자리를 채웠다. 이제 그는 산촌유학 ‘이모’는 아니지만 한 장면은 잊지 못한다. “한여름이었어요, 도시 집으로 돌아갔던 아이들이 기차, 버스 타고 산골마을까지 저희들끼리 왔어요. 시장에서 산 복숭아를 검은 비닐봉지에 들고 ‘이모~’ 하면서요.” 산촌유학 ‘이모’로 주민들을 모아 아이들과 프로그램도 짜면서 마을공동체에 관심이 커졌다.
2010년 학교를 떠난 건 그만이 아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그의 아들도 학교를 떠났다. “‘학교를 꼭 안 가도 되면 나는 안 가도 될 거 같아’ 그래요. 그러라고 했죠. 욕 많이 먹었어요. 부모는 대학 나와놓고 아이들한테는 기회 안 준다고요. 그런데 저는 자신 있었어요. 제 기준은 ‘얘가 제 앞가림을 하겠냐’는 거였어요. 하겠더라고요.”
아들은 4년 동안 홈스쿨링이 아니라 ‘마을뒹굴링’을 했다. 그야말로 마을에서 뒹굴었다. 소호마을에서 학교 안 간 친구 5명과 배추농사를 지어 팔고 록밴드를 만들었다. 그러다 대안학교에 가겠다고 했다. “대안학교에 다니면서 책, 영화 보고 뭘 막 쓰더라고요. 그 글 보고 놀랐어요. 얘가 학교 안 다닌 아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괜찮은 글이었어요.”
첫째와 달리 둘째 딸은 학교에 가겠다고 했다. “오빠 보니, 학교 안 가고 농사짓는 게 더 힘든 거 같다더라고요.” 중학교에서 친구들과 신나게 놀다 고등학교 때 자퇴했다. 딸은 양산 여행학교에 들어갔다. 학비는 당시 제주도에서 일하던 오빠가 댔다. “딸은 어린 시절 ‘도시에서 살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거든요. 진짜 작사 작곡까지 해서 불렀어요. 거지꼴을 하고 세계 반대편까지 가보더니 시골에서 소박하게 사는 게 중요한 가치임을 알았다고 하더라고요.”
이제 27살인 아들은 소호마을에서 공방을 하고 제빵을 배운 딸은 경남 산청 공동체 마을 ‘큰들’로 갔다. “아이들은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요. 학교 안 간 거 후회한 적 없냐고 아들한테 물으니 그런 생각 안 해봤대요. 경쟁하지 않고 자란 아이들은 두려움, 불안이 없어요. 당연히 학교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물어요. 당신 아이들은 학교를 안 다녀 행복하냐고요. 저는 그게 폭력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해요. 학교에 다녀도 안 다녀도 나름의 어려움과 행복이 있잖아요. 그런데 학교 안 다닌 사람한테는 꼭 그렇게 묻더라고요.”
변방에 희망이 있다
땡땡마을은 학교 건물인데도 가래떡처럼 포근한 공기가 있다. 한 귀퉁이의 흙놀이터에는 한 아이가 만든 누워 있는 사람이 있다. 한쪽 다리를 꼬고 싱긋 웃고 있다. 다른 귀퉁이엔 상북면 어린이들이 보낸 감사 편지가 있다. 주민들이 상북면 어린이 333명 모두에게, 한 명씩 다 다른 이야기를 써서 다육식물과 함께 선물하고 받은 편지다.
2024년 2월 그는 이곳에서 ‘뛰어내리려’ 한다. 운영실장을 그만두려 한다. “제 역량이 다하기도 했고, 다른 사람이 새롭게 꾸려갈 기회를 줘야죠. 그래야 여기가 더 풍성해져요. 저는 다시 0부터 시작하면 돼요. 마을교사들이 깊이 그리고 넓게 성장했으면 좋겠어요. 마을교사 정체성을 쭉 이어갈 분들도 있으면서, 많은 사람에게 기회도 열리길 바라요. 모순처럼 보이지만 마을이라면 풀 수 있어요. 교육감이나 의회가 바뀌더라도, 어떤 태풍이 와도 마을교사들이 땡땡마을을 지탱하는 근력이 됐으면 좋겠어요. 저는 변방에 희망이 있다고 믿어요. 새로운 바람, 어떤 힘이 나와요. 변방 사람들은 절실하니까요.”
인디언수니의 노래 <나무의 꿈>은 그의 ‘최애곡’이다. 그는 언젠가 한 사람이 한 소절씩 이어 불러 이 노래를 합창해보고 싶다. “나무 한 그루 되고 싶었지/ 아름드리 어엿한 나무가/ 만개한 꽃처럼 날개처럼/ 너를 품고 너희들 품고/ 여우비 그치고 눈썹달 뜬 밤/ 가지 끝 열어 어린 새에게/ 밤하늘을 보여주고/ 북두칠성 고래별 자리/ 나무 끝에 쉬어가곤 했지” 그는 땡땡마을이 그 나무라고 했다.
글·사진 김소민 희망제작소 연구위원
*X의 지역작당: 경쟁이 아닌 연대, 개인이 존중받는 공동체, 자연을 해치지 않는 인간의 삶을 찾아 다 아는 길 대신 미지의 X를 택한 사람들.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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