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봉틀과 함께 보낸 45년…‘노동자의 옷’ 만드는 할아버지
서울 영등포구 양남사거리 양평파출소 건너편에 있는 작업복 전문점 ‘서울사’. 색이 바랜 간판 아래 형형색색 조끼 10벌가량이 걸려 있는 이곳에서는 매일 오전 8시부터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45년. 반백년에 가까운 세월을 정순근씨(76)는 이곳 서울사에서 노동자들의 옷을 만들며 지냈다.
“바지는 30분, 점퍼는 1시간30분. 금방 만들지.” 지난 18일 서울사에서 만난 정씨가 말했다. 치수에 맞춰 원단을 자르고 바느질을 한 후 단추·지퍼 등 부자재를 다는 일까지, 작업복의 시작과 끝이 그의 손을 거쳐 간다. 정씨는 주로 공장 노동자들이 입는 옷을 만든다고 했다. 금형공장, 제분공장, 봉지공장 등 셀 수 없이 많은 공장에 작업복을 팔았다. 경비원들의 셔츠, 병원 의료진의 흰 가운도 그가 만드는 작업복이다.
처음부터 작업복을 만든 것은 아니었다. 전북 순창에서 칠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정씨는 집안 사정이 어려워 중학교를 마치지 못했다. 일하면 밥도 준다는 한 양복 전문점에 찾아가 ‘시다’ 생활을 했다. 양복 만드는 데는 도가 텄을 즈음, 박정희 정부가 들어섰다. 공무원들이 ‘재건복(국민 생활 계몽 운동으로 도입된 복장)’을 입게 되면서 양복이 더 팔리지 않았다. 얼마간 체육복을 만들어 팔던 정씨는 돈을 더 벌어볼 생각으로 서울로 올라왔다. 그때부터 작업복 전문점을 열었다.
정씨가 터를 잡은 영등포 일대는 1930년대부터 서울의 대표적인 공업단지였다. 제분공장, 방적공장 등이 빼곡히 들어섰던 1980년대, 정씨 가게도 직원을 10명까지 둘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세월이 흘러 공장은 사라졌고,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섰다. 일대 작업복 전문점도 자취를 감췄다. 코로나19 이후에는 중소기업의 발주가 눈에 띄게 줄었다. “이전에는 잘 나갔어. 우리 가게가 제일 컸는데, 하루에 100벌도 넘게 만들었지.” 정씨는 요즘 하루 10벌 정도 작업복을 만든다고 했다.
정씨는 요즘 홀로 일한다. 3년 전 ‘평생 동료’로 곁에 있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안사람은 세타(스웨터) 만드는 기술자였어. 공장 근처에 살던 안사람 언니가 소개해줘서 만났지. 나보다 한 살 많아서 다들 ‘누님’이라고 불렀어.” 이 자리를 지켜온 세월만큼, 반가운 인연이 불쑥 서울사를 찾곤 한다. 지난해에는 수십 년 전 작업복을 사 갔던 한 공장 사장이 근처를 지나다가 간판을 보고 놀라 들어왔다. “아이고 사장님, 아직도 하시네, 직원들 많이 불었으니까 30벌 해주세요, 그러더라고. 엄청나게 반가워했지.”
작업복은 여전히 그의 자부심이다. 정씨는 형틀공장 노동자의 겨울바지가 될 남색 원단을 재봉틀 위에서 바쁘게 움직이며 말했다. “나는 바느질을 꼼꼼하게 혀요(해요). 그래야 튼튼하고 오래가고. 입는 사람들 앉았다 일어났다, 편하게 할 수 있게 하지. 고장 나지 않도록 지퍼도 단가가 비싼 놈(것)을 쓰고, 원단도 색이 잘 안 바래는 좋은 것을 쓰고….”
정씨는 “바늘귀에 실 끼울 수 있을 때까지 계속 일하고 싶다”고 했다. “우리 아들들이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해. 평생 늙어서도 일을 하니까. 아버지같이 대단한 사람이 어디 있냐면서.” 정씨는 여전히 본인이 입을 작업복을 직접 만든다. 그는 “미미한(흐릿한) 색깔은 싫고 자주색, 수박색 같은 화려한 색깔이 좋다”며 웃었다. 가게 한편에는 30년 전 그가 자신을 위해 만든 양복 재킷이 걸려 있었다.
배시은 기자 sieunb@kyunghyang.com, 강은 기자 ee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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